거제도의 매화(梅花) | ||||||||||||
[연재] 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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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무들이 추위에 벌벌 떨고 있을 때, 매화는 꽃을 피운다. 온갖 시련과 역경을 딛고서 모든 사물들이 꽁꽁 얼어붙은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난 꽃이라, 옛사람들은 매화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화사하게 웃는 매화꽃의 미소가 반갑기 그지없다. 이 땅에 이름난 고매화에는 이름이 따로 붙어 있다. 일운면 구조라 매화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봄이 오기 전에 미리 봄을 알리는 '보춘매(報春梅)'이다. 구름 잠긴 바다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옥 같은 꽃향기 피워 온 마을이 달콤하다. 거제유배객 김진규(金鎭圭), 조병현(趙秉鉉) 선생은 고난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시(詩)를 읊었다. 견화유사(見花有思) 꽃을 보니 생각나네. / 김진규(金鎭圭) 1691년. 梅花半落杏花開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海外春光客裏催 바다 멀리 봄빛이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遙憶故園墻北角 멀리 고향 우리 집의 담 북쪽 모퉁이 數株芳樹手曾栽?내가 심은 몇 그루 나무도 꽃 피어났으리.
거제면 동상리 반곡골짜기에 유배 살던 김진규(金鎭圭)선생은 초봄 매화꽃이 지면서 살구꽃이 피는 쌀쌀한 날씨 속에, 두고 온 고향집 정원에도 거제도처럼 꽃이 활짝 피기를 바라며, 선생의 마음속 희망과 설레임, 그리고 조바심을 함께 표현한 노래다. 선생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79년 거제면 반곡 골짜기로 송시열(宋時烈)에 이어 같은 곳에 유배왔으며, 그 뒤를 김창집 선생이 뒤따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복권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전서 ·예서와 산수화 ·인물화에 모두 능하였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거제유배 時, 약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感島中梅花 거제 매화에 감응하여 / 1692년 김진규(金鎭圭). 매화를 읊다(咏梅) 五首 中. / 조병현(趙秉鉉) 1848년.
조병현
1791(정조 15)∼1849(철종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우당(羽堂). 경(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명(鎭明)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득영(得永)이다. 어머니는 이문원(李文源)의 딸이다.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를 거쳐 1827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뒤 만영(萬永)·인영(寅永)·병구(秉龜) 등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1832년 세자시강원의 겸보덕(兼輔德), 이듬해에는 공충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판서에 올랐다.
다음 해 병조판서·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안동 김씨를 배척하는 벽파(僻派)의 실권자로서 천주교를 탄압, 앵베르(Imbert, 范世享)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살육하는 기해박해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840년에는 호조판서로 전임하여 『동문휘고(同文彙考)』 편찬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44년 좌참찬에 올랐다가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병조판서·규장각제학·예조판서·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1847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이 해 안동김씨파의 정언 윤행복(尹行福), 대사헌 이목연(李穆淵) 등의 탄핵상소를 받아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나 정언 강한혁(姜漢赫), 대사헌 이경재(李景在) 등의 탄핵을 받았으며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전라남도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 해 9월 사사되었다. 저서로 『성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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