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2012-03-01 오후 7:2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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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시위를 최초로 창안한 독립운동가 조동식 선생을 추모 하는 봉화 재현식이 1일 청원군 강내면 태성1리 선영에서 열렸다. 이시종 지사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며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 |
| "대한독립만세"
1일 오후 5시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독립투사 고(故) 조동식 선생 묘소 앞이 순백의 태극기 물결로 수놓아졌다.
조동식 선생 3·1절 추모행사 추진위원회가 선생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이날 행사는 특히 선생이 전국 최초로 횃불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당시의 모습도 그대로 재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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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23일 밤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뒷산 봉수대에서 환한 횃불이 피어오르고 때를 맞춰 태극기를 손에 쥔 주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쏟아져 나왔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힌 이 횃불은 곧이어 인근 옥산과 남이면을 거쳐 천안, 경기도 일원으로 퍼져나갔다. 이 횃불 운동은 이후 1주일 이상 지속됐다.
전국 최초로 전개 된 횃불독립운동은 태성리 출신 독립투사 조동식(1873~1949)선생이 주도한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당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선생은 곧바로 횃불 운동 주동자로 일제에 의해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됐다.
선생의 후손인 조흥연 청강의료재단 이사장은 "출소 당시 증조부는 심한 고문으로 인해 제대로 걷지를 못해 마을 장정들이 가마에 태워 집으로 내려왔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독립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1925년 만주로 망명했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옛날 선조들이 나라에 위급한 변이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봉화를 이용해 이를 전국에 널리 알렸다는 것을 이용해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망명 후 새우젓 장사 등 온갖 고생을 해서 마련한 자금을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했다.
이후 선생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장손자인 남식만 데리고 귀국했다. 특히 선생이 중국에 남겨 뒀던 손자 조남기(85 전 부주석)옹이 군 최고계급인 상장(우리나라 대장 급)에 오르면서 중국 최고 실세인 6인방 중 한사람이 됐고 그는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우상이 됐다. 그러나 조 전 부주석이 6·25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 대위(군수 담당)로 참전했던 행적이 알려지면서 공산당원을 후손으로 두었다는 비난 여론으로 인해 선생의 공적도 폄하돼, 그동안 종중(풍양 조씨)들만 모여 3·1절에 즈음해 태성리 선생 묘소에서 조촐한 추모 행사를 벌여왔다.
3·1운동 93주기를 맞은 올해는 지난 20일 조동식선생 3·1절 추모행사 추진위원회(회장 조방형)를 구성하고 1일 선생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태성리 현지에서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거행했다.
선생의 증손자이자 조남식 전 부주석 친 조카인 조흥연 이사장은 "조동식 선생이 3·1운동 당시 충북에서 전국 최초로 횃불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추진하게 됐다"며 "올해는 한·중 수교 20년을 맞는 해로 당시 양국의 수교에 큰 역할을 했던 삼촌 조남기 전 부주석에 대한 재평가를 받는 기회를 위해 큰 행사를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선생과 조 전 부주석 생가를 재현하고 이에 따른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조동식 선생은 1977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청원 / 조항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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