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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김씨 돌림자

익원공파

[뉴시스아이즈]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석 김구 선생과 그의 후손들
등록 일시 [2011-08-08 10:38:27]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가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네 번째로 백범 김구 편을 게재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 72세였던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의 한 부분이다. 김구 선생은 10대 후반 독립운동을 시작해 74세의 나이로 경교장에서 흉탄에 맞아 서거할 때까지 평생을 민족의 독립에 바친 애국지사다.

그는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 익원공파 21세손이지만, 빈농인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사이에서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구안동김씨는 고려 말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벌해 개국공신에 봉해진 김방경과 다섯 아들, 손자들이 모두 고려와 조선의 명신록(名臣錄)에 오를 정도로 이름을 떨친 명문가다.

김사형(익원공)은 조선 개국에 적극 가담해 개국 일등공신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함께 고려말 충신이던 그의 형 김사렴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거부하고 도산(현 안동)에 은거했다. 벼슬을 거부한 김사렴의 후손들 중 일부는 훗날 황해도 해주로 이동, ‘해주김씨’로 분적했다.

이 때문에 조선 초 세력을 떨친 안동김씨 후손 중에는 익원공파가 많다. 사육신의 단종복위모의를 좌절시키고 세조 때 우의정까지 오른 김질도 익원공파다. 김질의 아우 김무는 공조판서에, 김질의 손자 김찬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김질의 조카 김수동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수동의 동생 수경은 정국삼등공신 영양군에 봉해졌다.

안동김씨는 인조 때 김구의 방계 조상인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급격하게 몰락했다. 인조반정에 참가했던 김자점은 공을 세워 영의정까지 올랐고, 인조의 딸 효명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권세를 누렸다. 그는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 등과 친하게 지내며 청의 후원을 받았다.

하지만 1646년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북벌론’이 대두되자 김자점은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이후 효종의 북벌론 계획을 청에 밀고, 광양으로 유배됐고 이후 아들 김익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처형당했다.

김구 선생의 11대조는 당시 멸문지화를 피해 황해도 해주로 이동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김구 선생은 이에 대해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우리의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게 돼 내 11대조가 처자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해주의 백운방 텃골 팔봉상 산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했다”며 “그때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조상들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됐다”고 기술했다.

1876년 7월11일 황해도 해주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구 선생은 9세부터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 김순영은 당시 김구가 양반의 자식들이 다니는 서당에서 텃세를 당할까봐 집안에 직접 서당을 세울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김구 선생은 15세부터 서당에서 본격적으로 한학을 공부했고 17세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벼슬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세태에 절망한 김구 선생은 18세 때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을 창수로 바꿨다.(아명은 창암. 구(九)는 38세이던 1913년 옥중에서 고친 이름)19세 때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고, 이 사건으로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의 집에 은거했다. 안 의사와의 운명적 첫 만남이었다.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와의 첫 만남에 대해 백범일기에서 “그때 중근은 열세 살로, 머리를 자줏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었는데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했다”고 회고했다.

김구 선생은 20세였던 1895년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에서 의병부대에 소속돼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의 손해 시해된 해였다. 그는 명성황후 서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일본 중위 쓰치다를 죽여 체포됐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종의 특명으로 1897년 특사, 구사일생했다.

김구 선생은 이에 대해 “법무대신이 내 이름이 있는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해 상감의 칙재를 받았는데 상감이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국모의 원수를 갚음)임을 이상하게 여겨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라 한다”며 “이 네 글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20대 후반에는 기독교에 입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했다. 비밀단체인 신민회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했다. 1909년에는 하얼빈에서 벌어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연루, 해주감옥에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김구 선생은 1911년 1월 안명근(안중근의 사촌) 사건 관련자로 체포돼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 등으로 5년 후인 1916년 출옥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경무국장이 됐고 내무총장과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했다.

1928년에는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1931년 일본수뇌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1·8 이봉창 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1933년에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만나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의 무관양성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한 후에는 중국정부와 정식 협정을 맺어 광복군이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항일 공동작전을 펼쳤다.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그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 신탁통치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는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주장했다.

73세이던 1948년 ‘3000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내고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호소했고, 평양을 찾아 남북협상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1949년 6월26일 자택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생을 마감했다. 암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 평생을 마친 김구 선생의 둘째아들인 김신 전 의원 역시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군참모총장을 거쳐 주중대사와 9대 국회의원, 21대 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김신 전 의원의 아들 김양씨는 주상하이 총영사관 총영사와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딸 김미씨는 빙그레 회장을 지낸 한나라당 김호연 의원의 부인이다.

김구 선생 일가는 김구-김신-김양으로 이어지는 '상하이 주재 3대' 기록을 남겼다. 3대에 걸친 공군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신 전 의원의 뒤를 이어 아들 김양씨가 공군 중위로 전역했다. 김 전 의원의 사위인 김호연 의원 역시 공군 사관후보생을 지냈다.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용만씨와 외증손자인 동만씨도 공군 사관후보생으로 각각 임관했다.

pjy@newsis.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39호(8월1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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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Baikbum Kim Gu.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없음
전임: 홍진(제8대)
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
후임: 이승만(제21대)

국적 조선·대한제국 (1876년 - 1910년)
중화민국 중화민국 (1919년 - 1945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1948년 - )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사망일 1949년 6월 26일 (73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2층 거실
정당 한국독립당 (1928년)
한국국민당 (1935년)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종교 유교(성리학)→동학불교감리교천주교(교명 베드로)
배우자 최여옥 (약혼 중 사망), 최준례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태어난 곳 조선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죽은 곳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별명 초명 창암, 자는 연하, 창수, 호는 백범, 연상, 법명 원종, 다른 이름은 김두래, 김두호, 장진구
복무 한국 광복군
최종 계급 광복군 대원수(통수권자)
지휘 한국 광복군 통수부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독립운동가, 승려, 교육자,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주석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교육자 겸 종교인, 독립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정치인이었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1] 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감리교에 귀의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을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동경 의거, 윤봉길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근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3][4]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5], 신민회에서 활동한 감리교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6] 이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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