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정공(휘 九德) 소개 및 연보
충렬공(휘 방경)의 현손으로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묘는 경기도 여주군 삼승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첫번째 일요일에 시제를 봉행한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안정공 후손 중 역사적 인물 : 김구덕-김오문-김중엄-김뉴
*음죽 : 지금의 장호원, 감곡, 생극, 무극 일원으로 현청은 이천과 장호원 사이 '선비'라는 곳이었음 (2004. 3. 17. 윤만(문) 제공)
<김구덕 연보> (2005. 2. 14. 주회(안) 제공)
조선 초기의 문신.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로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의 동생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1379년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 여러번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거쳐,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金五文의 딸)가 세자빈(문종, 휘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그는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였다.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묘는 경기 여주군 가남면 원승리에 있다.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묘소 사진
2)묘소 참배, 답사기 (2007. 2. 25. 윤만(문) 제공)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승리
(여주 가남)안정공(김구덕) 묘소 답사기
한 달포 전에 감곡향토문화연구회 김근태 회장으로부터 음성군지가 1963년, 1979년, 1996년에 이어 4번째로 증보 발간을 하기 위하여 편집인 및 편찬인이 위촉되어 있으니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마침 둘째형님 칠순 잔치와 정해년 개미실산우회 시산제도 고향산(국망산)에서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2.24(토)~25(일) 양일간에 걸쳐 고향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고향 장호원 인근인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승리에 계시다는 안정공(김구덕) 묘소를 찾아보기로 하고, 혹시나 하여 충남 공주에 거주하고 계시다는 안정공파종회장 김재환님의 전화번호까지 챙겨가지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였습니다.
출발전 지도를 살펴보니 삼승리는 이천-여주군 가남면 태평리에서 가는 길과 감곡I.C에서 장호원으로 가는 길 두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것 같아 감곡I.C에서 장호원 코스를 택하였습니다. 장호원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청미천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이천 장호원과 충북 음성 장호원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구한말까지는 음죽현으로 단일 행정구역이기도 하였구요.
감곡에서 청미천 다리를 건너면서 바로 우회전을 하면 여주군 점동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예전과 달리 이제는 넓게 잘 다듬어진 도로가 펼쳐집니다. 노탑리(거머리)-풍계리(홍시)를 지나면 웅장한 모습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앞을 가로막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점은 작은 4거리인데 이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면 삼승리-빅토리아골프장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약 5분정도 지났을까, 좌측에 지방하천 삼승천 안내표지판이 보이고, 우측으로 논두렁에 소나무가 한 그루 외롭게 서 있으며, 그 넘어에는 낮은 산과 숲으로 둘러쌓인 마을이 있는데 하늘색, 붉은색, 밤색 지붕을 한 정감있는 마을입니다. 그리고 전방 우측으로 삼승보건진료소가 보임으로 이곳이 삼승리임을 짐작케 합니다. 마침 보건진료소 옆에는 삼승리 구판장과 노인회관이 있어 이른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인회관을 방문하니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안동김씨 산소 중에 오래된 산소를 찾아왔는데 혹 알고 계시느냐”고 여쭈니 최씨 할머니라는 분께서 대뜸 “김구덕 산소를 찾느냐”고 반문을 하며 바로 우리 집 위에 그 산소가 있다고 하시며 따라 나서신다. 와! 정말 운이 좋은 날입니다. 이렇게 딱 한 번에 제대로 찾았으니 말입니다. 승용차로 앞서 언급한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바로 위 낮은 산록에 그토록 탐방하고자 하였던 안정공 묘역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안정공 묘역은 쌍분으로 니키다 소나무로 둘러쌓여 있고, 오래된 묘갈 2개, 상석 2개, 자그마한 문인석 한쌍이 있으며 망주석은 없었습니다. 묘소 입구 쪽(좌측)에 있는 묘갈을 살펴보니 “贈諡安靖公金九德之墓”라 판독이 가능한 정도로 보존되어 있고 우측은 배위 분으로 추정되는데 묘갈의 판독이 어려운 정도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짧은 식견이나마 동원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宅主辛氏之墓”로 위의 2~3글자의 판독이 어렵습니다만 매울신자를 쓰신 영월신씨 할머니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 탁본을 떠서 살펴보면 판독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집에 돌아와 경진보, 기미보, 안정공파문중회 자료를 찾아보아도 배위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묘갈을 살펴본 결과 좌측이 안정공, 우측이 배위 할머니의 봉분입니다.
안정공 묘역을 원거리에서 근거리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노인 두 분이 다가왔습니다. 한 분은 전주인 이우찬이란 분이고 또 한 분은 표성운(75세)이란 분인데 마침 이우찬 노인이 바로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심좋으신 이우찬 노인께서 저희 내외를 당신 집으로 안내하여 커피까지 권하시며 안정공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를 전해 주십니다.
이우찬 노인께서 말씀하기를 이곳 삼승리의 옛 이름은 원승이라고 하고, 안정공의 묘소는 오랫동안 실전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신이 이곳에 이주한지 30년이 다돼 가는데 대략 25년쯤 전에 실전된 묘소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안정공의 묘역은 강릉최씨 소유의 산에 위치하고 있다 합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 가지 상념이 흘러갑니다. 왕의 장인으로서 판돈령까지 지내신 분이 왜 강릉최씨 소유의 산에 모셔져 계실까요. 시제 때는 공주, 제천, 원주 등 경향각지에서 25분 내외의 후손이 시제 참례를 하고, 시제답은 처음 3마지기에서 7마지기(약 1,400평)로 늘려 경작하여 안정공 묘역관리와 시제를 운영하는데 충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예전에는 안정공 묘역을 올라가는 입구가 현재의 위치와 달리 정 중앙에 돌로 만든 계단으로 되어 있었으며, 묘역 앞에는 연못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고증은 현 묘역 입구에 망주석 1개가 땅에 묻혀 있는데 지금은 봉분도 없이 훼손되어 있으나 이곳에도 안동김씨네 묘가 1기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석과 망주석 1개는 도난을 당하고 우여 곡절 끝에 망주석 1개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 김근태 회장을 만날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한마디 남겼습니다. “곧 안사연 여러분들이 이곳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라고, 그러나 돌아 나오는 길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삼승리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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