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외롭다면 후손 도리 아냐
등록 :2009-02-26 18:18수정 :2009-02-26 19:13
가난 탓에 생가 사라지고 추모비도 없어
“친일 음악가는 죽어서도 대우를 받는데 외길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잊혀지나요 ….”
해방 직전 ‘부민관 의거’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1926∼2008)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 조 선생의 고향인 경기 화성시 매송면 야목2리 들목마을에서 만난 주민 최영태(71)씨는 “조 선생의 추모비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아쉬움을 나타냈다.
들목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조 선생은 45년 3월 친일파와 총독부 주요 인물 처단을 위해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애청)’을 조직했다. 같은해 7월24일 서울 태평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박춘금 등 대표적 친일파들과 총독부 주요 인물이 ‘아시아 민족분격대회’를 열자 조 선생은 유만수·강윤국 선생과 함께 시한폭탄을 설치해 터뜨렸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부민관 폭파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 선생은 해방 뒤 독립운동가인 체하지 않았다. 사촌동생 조택기(71)씨는 “친일파들이 날뛰는 세상에 상이 무엇이냐며 주변 아무에게도 자신의 독립운동 행적을 말하지 않으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조 선생은 77년 보훈처에 문의해 동지였던 유만수·강윤국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다. 조 선생은 자신의 책 <슬픈 조국의 노래>에서 “유 동지가 서울 중랑교 다리 밑에 판자집을 짓고 어렵게 살다 폐병 3기 진단을 받은 뒤 굶어 죽었는데 유 동지가 알면 펄쩍 뛰었겠지만 가난에 찌든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 선생 자신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거부하다 부민관 거사 이후 37년 만인 82년이 되어서야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받았다. 가난에 쪼들리는 것을 보다 못한 주변 지인들의 강권에 의한 결과였다.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과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지내면서 말년에는 들목마을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인 송라리 풍양 조씨 선산에서 산지기로 어려운 생계를 잇기도 했던 조 선생의 생가는 없어졌고 그마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됐다.
이호헌 전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남부지부장은 “같은 화성 출신으로 친일 행적이 드러난 홍난파는 수백억을 들여 생가 복원과 기념관 조성 사업이 추진되는 반면 평생을 나라의 진정한 독립에 몸바친 조 선생은 죽어서도 외롭다”며 “이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화성/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