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돼지를 멧돼지로 만들어라
머니투데이 입력 2004.11.05 06:16
[머니투데이 노부호서강대경영학과 교수?] 인류발전의 역사는 자유화와 개방화의 역사이다. 즉, 자율과 책임의 수준을 심화시키는 역사이고 사람들을 집돼지에서 멧돼지로 만드는 역사이다. 우리는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서 개방화와 자유화의 수준을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19세기말 세계는 개방화의 큰 물결을 경험했는데 그 때 우리는 쇄국정책으로 우리 역사를 50년 이상 후퇴시켰다.
우리가 일본에 뒤진 것은 개방화에 늦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14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해상활동을 했고,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그 후 17세기 초반부터 화란상인들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그들로부터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였다. 이때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이 일본 규슈에 진출하면서 교회도 세우고 전도도 하면서 일본의 서구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43년에 규수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조총을 전수 받았는데 그 50년 뒤인 1592년에 우리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해상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격퇴했지만 육상에서는 조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본은 16세기 말부터 동남아 무역을 시작하여 필리핀,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상인들이 거기서 ‘일본 촌’을 건설하여 살다가 도꾸가와 막부 초기에 해외진출을 제한하여 귀국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다. 17세기 중엽부터 ‘난학(蘭學)’이라고 해서 서양의 의학 등을 받아들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서양화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우리보다 앞선 것이다. 19세기후반의 서구열강과의 수교과정에서도 우리는 일본에 뒤졌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해군제독 페리가 이끄는 흑선의 공격을 받아 미국과 개방을 약속하고 수교를 맺게 된다.
우리는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군을 격퇴하여 척화비를 세우면서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하지만 그 후 50년 뒤인 1905년에 우리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와 같이 일본의 개방은 역사가 길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고 서구의 기술을 일찍부터 받아들이게 되어 뒤에 일어난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기초가 되었다.
지금도 개방화는 하나의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21세기 초인 지금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화의 큰 물결을 경험하고 있다. 자유화는 정부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경제운영의 틀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자유화의 나라인 미국도 더 높은 자유화를 위해 복지예산을 줄이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와 산업화 시대의 차이는 변화와 기회이다. 정보화 시대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파이를 나누는 사회주의보다 파이를 키우는 자유주의가 세계사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자유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역사를 50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19세기말 우리가 일본보다 늦게 개방함으로써 일본에 뒤지고 일본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당한 역사를 상기하여야 하고 우리가 일본을 앞서가려면 자유화에서 앞서가야 하는데 또 늦어지고 있으니 극일은 구호로만 있는 요원한 목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에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노부호서강대경영학과 교수?< 저작권자 ⓒ머니투데이(경제신문) >
우리가 일본에 뒤진 것은 개방화에 늦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14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해상활동을 했고,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그 후 17세기 초반부터 화란상인들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그들로부터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였다. 이때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이 일본 규슈에 진출하면서 교회도 세우고 전도도 하면서 일본의 서구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43년에 규수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조총을 전수 받았는데 그 50년 뒤인 1592년에 우리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해상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격퇴했지만 육상에서는 조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본은 16세기 말부터 동남아 무역을 시작하여 필리핀,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상인들이 거기서 ‘일본 촌’을 건설하여 살다가 도꾸가와 막부 초기에 해외진출을 제한하여 귀국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다. 17세기 중엽부터 ‘난학(蘭學)’이라고 해서 서양의 의학 등을 받아들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서양화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우리보다 앞선 것이다. 19세기후반의 서구열강과의 수교과정에서도 우리는 일본에 뒤졌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해군제독 페리가 이끄는 흑선의 공격을 받아 미국과 개방을 약속하고 수교를 맺게 된다.
우리는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군을 격퇴하여 척화비를 세우면서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하지만 그 후 50년 뒤인 1905년에 우리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와 같이 일본의 개방은 역사가 길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고 서구의 기술을 일찍부터 받아들이게 되어 뒤에 일어난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기초가 되었다.
지금도 개방화는 하나의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21세기 초인 지금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화의 큰 물결을 경험하고 있다. 자유화는 정부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경제운영의 틀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자유화의 나라인 미국도 더 높은 자유화를 위해 복지예산을 줄이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와 산업화 시대의 차이는 변화와 기회이다. 정보화 시대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파이를 나누는 사회주의보다 파이를 키우는 자유주의가 세계사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자유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역사를 50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19세기말 우리가 일본보다 늦게 개방함으로써 일본에 뒤지고 일본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당한 역사를 상기하여야 하고 우리가 일본을 앞서가려면 자유화에서 앞서가야 하는데 또 늦어지고 있으니 극일은 구호로만 있는 요원한 목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에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노부호서강대경영학과 교수?< 저작권자 ⓒ머니투데이(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