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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사

노 백린

 

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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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

노백린(盧伯麟, 1875년 음력 1월 10일~1926년 양력 1월 22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계몽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비행사이다. 임시정부의 각료로 활동하며 교통총장, 군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아호는 계원(桂園)이고, 별호는 진방(鎭邦), 진영(珍榮)이다. 본관은 풍천이다.[1]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게이오 의숙(慶應義塾)과 성성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단기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뒤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되고 1900년(광무 3년) 10월 귀국하여 윤치성, 이갑, 류동렬 등과 함께 육군 참위에 임관, 대한제국 국군을 신식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한국무관학교육군연성학교의 교관, 한국무관학교 교육국장, 연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1년) 군대가 해산당하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해서교육총회 조직 등에 참여하였으며, 광산업과 피혁상에 종사하였으나 사업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비행사 훈련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다. 그해 9월의 통합 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군무총장으로 유임되었고,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를 양성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되돌아가 임시정부국무총리 대리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875년(고종 12년) 음력 1월 10일 황해도 송화 풍해면 성하리에서 성리학자인 노병균(盧秉均)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일설에는 1873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원적지는 황해도 은율이며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도 컸다 하며, 마음이 침착, 차분하면서도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한다. 1895년(고종 32년) 대한제국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게이오의숙일본육군사관학교(제11기)를 졸업했다.

 

계원 노백린 장군 80주기 추모식

뉴시스 | 입력 2006.01.20 14:58

【서울=뉴시스】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계원 노백린(盧伯麟.1875∼1926) 장군 80주기 추모식이 21일 오전 11시 서울 국립묘지 임정묘역에서 친지, 종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가족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장군은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 189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뒤 1900년 귀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다 1907년 신민회를 창건해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2대 군무총장으로 선임돼 1926년 상해에서 순국할 때까지 교통총장, 참모총장,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등 신망과 존경을 받는 군인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유족으로는 장손인 노영훈씨가 있다.

허겸기자 khur@newsis.com

 

비행학교 급속히 자리 잡히자 日 칼날 세워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18>
2011. 10. 07   00:00 입력 | 2013. 01. 05   07:15 수정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위해 미국에 설립한 비행학교가 급속히 체계를 잡아가자 일본은 이 비행학교에 대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진은 1920년 9월 20일자 일본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 p14~16.

기사사진과 설명
임시정부 비행학교 실제 모습. 사진 속에 비행기 3대가 확실히 보인다.#

임시정부 비행학교 실제 모습. 사진 속에 비행기 3대가 확실히 보인다.#

임시정부 비행학교 실제 모습. 사진 속에 비행기 3대가 확실히 보인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1920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위해 미국에 설립한 비행학교가 급속히 체계를 잡아가자 일본은 이 비행학교에 대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본은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 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 수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 ‘구미재류 주의선인명부 송부의 건’(문서번호: 고경 제5429호, 발송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수신자: 외무차관)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문서번호: 비 제33호, 고경 제9189호,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내각총리대신) 등을 통해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다.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학무총장(현 교과부장관) 김규식의 활동에 대한 정보로부터 시작되는 20쪽 분량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라는 제목으로 3쪽에 걸쳐(p14~16) 임시정부 비행학교 문제를 다루고 이어서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북부 재미동포사회의 군사적 독립운동 동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정보보고서의 비행학교 관련 요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윌로우스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는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제1회 졸업생은 우병옥·오림하·이용식·이초 등 4명이며,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것이다.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 관계자들을 포함해 서구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각 인물을 중심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문건이고,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에서는 이 비행학교를 ‘호국독립군 비행기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의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의 전체적 윤곽과 관계 인물에서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정보가 취합돼 있어 일본 당국이 큰 틀에서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됐으나, 개교식 날짜, 노백린 직함, 졸업생 이름, 비행기 대수 등 여러 면에서 사실과 조금씩 차이가 있어 정보의 정확성 자체는 다소 떨어졌다.

 일본 정보보고서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당시 임시정부 비행학교가 실제로 보유했던 비행기의 대수로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에는 5대로 돼 있다. 그러나 같은 보고서에 기록된 다른 내용이 아주 틀렸거나 또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것처럼 이 숫자 역시 확실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 비행학교가 자체적으로 보유하는 비행기와 관련된 초기 기록은 미국 신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ly Journal) 1920년 2월 19일자로 “비행장 부지 40에이커도 이미 구매했다. 교관도 1명 채용했고, 최첨단 기종인 비행기 3대도 이미 사들여 곧 도착하는데”라고 쓰여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3대 중에서 첫 1대가 비행학교에 도착한 날짜는 1920년 6월 22일로 이날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은 “오늘 첫 비행기가 도착했다. 이 비행기는 홀스캇(Hall-Scott) 엔진 1개를 장착한 최신형으로 디자인도 최고”라고 썼다.

 이로부터 불과 열흘 만인 7월 2일 신한민보는 ‘한인비행기학교의 확장 - 윌로우스 하늘을 덮은 한국비행기 4척’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미 비행술을 졸업한 몇 분과 다수한 학생들이 합동하여 오랫동안 경영하던 비행술 연습할 일을 실시하는데 우선 교사 1인과 비행기 4대를 사오게 하며 제반 설비는 김종림 씨가 재정과 성력을 다해 진행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다시 이로부터 약 1개월 후인 8월 5일 신한민보는 ‘또 한 대 비행기를 준비’라는 제목으로 “비행가양성소의 경영은 이 위에 보도하였거니와 이제 비행기 1대를 더 사서 연습을 충분케 하며 이초·이용선 두 군은 양성소의 조교사 임무를 본다더라”고 보도했다.

 얼핏 보면 이 비행학교가 모두 합쳐 비행기 5대를 실제로 구매한 것 같으나 위 신한민보 기사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미 발생한 사실을 보도한 것인지 추진 중인 계획을 보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한편 당시 비행학교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 가운데 최소 2장은 각각 비행기 3대의 모습을 담고 있고, 또 다른 1장은 비행기가 4대인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담고 있으나 선명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1920년 9월 20일자 일본 정보보고서가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비행기가 5대 있다고 쓰고 있음에도 불구, 이는 보다 정확한 검증을 거쳐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 비행학교가 최소 3대 이상을 보유했던 것은 확실하며 최대 5대까지 보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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