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
길을찾아서] 광복군 출범 앞두고 목숨 잃을뻔한 총사령관 / 김자동
대한민국 22년, 1940년 9월17일 충칭시내 자링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가 열렸다. 당시 국무령 백범(오른쪽)과 총사령관에 임명된 백산 이청천 장군(왼쪽)이 단장에 나란히 서 있다. |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2
백범은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명의로 ‘한국광복군 편련 계획 대강’을 중국 국민당 간부 주자화(주가화)를 통해 장제스 군사위원장에게 제출했다. 이 ‘대강’은 모두 11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핵심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자주적인 한국광복군을 편성해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며, 중국 쪽에서 ‘중-한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아 연합사령부를 통해 광복군을 지휘·통솔하자는 것이었다.
5월 중순 장제스는 “한국광복군이 중국 항전에 참가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이를 비준하고, 군사위원회 군정부로 하여금 조속히 광복군 창설이 실현되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장제스 군사위원장의 재가가 떨어지면서 임정에서는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를 설립하고 백범이 위원장을 직접 맡아 창설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남파 박찬익, 백산 이청천(지청천), 춘교 류동열, 백파 김학규, 백강 조경한(안훈), 철기 이범석 등이 실무를 맡았다. 여기에 충칭에서 합숙을 하고 있던 청년공작대원 일부가 나와서 일을 도왔는데, 내 사촌형 석동도 여름방학 동안 40도를 넘나드는 염천 속에서 주로 백산과 철기의 일을 도왔다.
충칭은 창장강 물가에서부터 계속 비스듬히 위로 제법 높은 산정까지 올라가면서 이루어진 도시로 ‘산성’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의 공습에 대비해 충칭 시내에는 수십개의 대규모 방공호가 건설됐다. 충칭은 산비탈의 도시여서 호를 옆으로만 파 들어가면 되므로 비교적 쉬웠다. 그런데 전쟁 초기 동안 이 호들에는 환기시설이 없어 사람이 많이 들어가면 산소가 희박해져 질식사고가 자주 생겼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된 40년 여름에도 일본 폭격기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시내 폭격을 계속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시민들은 대부분 방공호로 피신하는데, 9월 초 방공호에 사람이 많이 몰려 산소 부족으로 수천명이 질식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때 석동 형이 백산을 모시고 방공호에 들어갔는데, 백산 선생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땀을 심히 흘리는 것을 보고 급히 사람들을 헤치고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 화를 면했다. 하마터면 광복군 창설 선언일을 바로 앞두고 사령관이 별세하는 일이 생길 뻔한 것이다.
대한민국 22년(1940) 9월17일 충칭시내 자링(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마침내 광복군이 탄생했다. 이 전례에는 중국군을 대표해 충칭위수사령관 류즈(유치) 장군과 중국 국공합작기구인 국민참정회의 저우언라이(주은래)·둥비우(동필무·공산당) 및 우톄청(오철성·국민당) 등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했다. 장제스가 치경문(축하문)을 보내와 이날 회의에서 낭독됐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가 회장인 중국부녀위문회에서도 축전과 축하금 10만위안을 보내왔다.
광복군 총사령부의 조직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기록으로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의 <특고월보>(1943년 1월호)에 실린 내용뿐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일본의 정보도 충칭에 있는 첩자를 통해 얻은 것이니만큼 완전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