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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 옹이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서울 효창공원의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뒷줄 가운데에 김구 선생이 서 있고, 앞줄 오른편에서 두번째에 김삼 옹이 앉은 자세로 함께했다. |
일제형무소 특식 거절 꼿꼿해 ‘간디’ 별명
김구 선생도 아껴… 제6대 국회의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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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독립운동과 구국에 헌신한 강릉 출신 ‘거인’이 스러졌다.
독립투사 김삼 옹. ‘동해안 지역의 유일한 생존 독립애국지사’로 불린 고인은 18일 오전 4시 30분 병상에서 향년 95세로 영면에 들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강릉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 때 일본 학용품 불매 운동을 벌이면서 항일운동에 눈을 뜬 고인은 졸업 후 18세 나이로 강릉 택시부광장 주변에 ‘삼원당’이라는 서점을 내고 독서회를 조직, 징용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 청춘을 항일운동에 바친 독립투사다.
청년독립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구성해 활동하다 1940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7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함흥형무소로 옮겨져 1945년 2월까지 수감번호 ‘469번’을 달고 5년여 동안 장기 복역했다.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속출하는 형무소에서도 특식을 일체 거절하고 항상 꼿꼿한 태도를 유지, ‘간디’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했다.
결혼 초기에 고인의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네 남편은 징용 나간 셈 치고 살아라”고 말할 정도로 고인의 청춘은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바쳐졌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찾아오자 고인은 강릉지역의 옛 동지들과 청년들을 규합, ‘건국청년회’, ‘우국동지회’, ‘한국독립당’, ‘민족통일건국전선’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통일된 조국을 만드는데 다시 매진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고인을 특히 아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김구 선생은 “김구(九)와 김삼(三)이니까 너는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농담을 던지면서 유별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고인은 시·도의원, 제6대 국회의원(1963∼1967년), 강릉김씨 대종회장 등으로 지역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고 윤봉길·김창숙 의사 기념사업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정기 함양과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기도 했다.
1970년대 초 모친상을 당했을 때 강릉의 한 지역인사가 집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 얘기 또한 대쪽 같은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세인들에게 회자된다. 그 지역인사는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니까 꽤 번듯한 집에서 살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초가집이어서 놀랐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1963년 독립유공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서훈했다.
지난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고인은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가슴에는 애국심과 고향 사랑 의식을 새기고 머리로는 과학기술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손은 일에 매진하는데 사용하고, 발은 통일의 길로 걸어가는데 쓰라”고 강조했다.
제67주년 광복절을 한달도 채 안 남겨두고 스러진 ‘거인’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다.
한편 유족으로는 부인 최완자 여사와 김태재(전 강릉보훈지청 근무)·석재(전 하나대투증권 강릉지점장)·귀자(강릉메디칼간호학원원장)·덕재(자영업)씨 등 4남3녀가 있다. 빈소는 강릉동인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22일 오전 8시, 장지는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선영이다. 연락처 (033)650-6165 강릉/최동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