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남양주,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시비(詩碑) 세워 |
파종회 창립 60주년과 대원군 서거 456년을 맞아 건립 |
기사입력: 2015/07/27 [14:58] 최종편집: | ⓒ 경기인터넷뉴스 |
한철수기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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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경기인터넷뉴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에는 조선조 제14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역과 재실(사당)이 있다. 이 재실에 현존하는 덕흥대원군의 시를 새긴 시비를 지난 6월 말에 세워졌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덕흥대원군의 유묵(遺墨)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언 절구 한시(漢詩)로 글씨체는 초서(草書)로, 해동서첩에 실려있으며, 대원군 15대 손인 이학주가 2008년 5월 도록에서 발견해 지난 6월 24일 덕흥대원군 제456주기 기신일을 맞아 시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 시비는 덕흥대원군의 유묵 영인본과 해설문을 비의 앞면인 비양(碑陽)에 적었으며, 비의 뒷면인 비음에는 헌성자의 이름을 새겼다.
聖恩如海泣無窮(성은여해읍무궁) 人言可與人情近(인언가여인정근) 父子君臣義亦同(부자군신의역동) 반평생 우수(憂愁) 속에 이미 반늙은이 되었는데, 바다 같은 성은(聖恩)이 눈물로도 끝이 없네. 사람들 말과 같이 인정(人情)에 끌린 것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도 그 의리 같을 진저.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 대종회 이해인 회장은 “대원군 30년 동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친필유묵으로 그 원본을 박물관의 사용 승인을 얻어, 작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파종회 창립 60주년과 대원군 서거 456년을 맞아 시비를 세우게 되어 매우 보람차다.”고 소회를 전했다. 한편 이시를 발견한 이학주 씨는 “이 시는 아버지 왕인 중종과 자신의 관계를 노래했으며, 부자유친과 군신유의를 말하고 있다. 왕과 신하가 아닌 아비와 자식의 도리를 내재하고 있다.”고 전언한다.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하성군이 16세에 제14대 임금으로 등극하므로 조선조 최초 대원군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덕흥대원군을 포함해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후에 원종으로 추존),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생존 대원군) 등이다. 조선 최초의 덕흥대원군은 1530년 3월 5일 태어났으며, 이름은 초(岹), 자는 경앙(景仰), 아명(兒名)은 환수(歡壽)였으며, 조선 제11대 중종의 9남이자, 증(贈)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는 영양군 이거, 정신옹주가 있다.
1538년 덕흥군(德興君)으로 책봉됐으며, 1542년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했다. 1552년 당대의 고관 몇 명과 사대부들과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됐다. 명종14년(1559년) 6월 14일(음력 5월 9일)에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해 그 해 9월 17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선조는 이후 생부의 묘를 덕릉(德陵)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순조 때 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王子君)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덕흥대원군의 묘역은 1980년 경기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됐으며, 그의 치적을 적은 신도비와 장남 하원군 내외의 묘도 있으며, 가까운 곳에 원찰인 흥국사도 있다. 남양주시에는 시인묵객이 많이 존재했고 다녀갔으나 후손들의 손에 의해 시비가 세워진 변안렬의 불굴가와 함께 남양주를 대표할 만한 시비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