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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이용익 History

2009/12/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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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은 조선 말기 정치가 겸 개혁가이다. 그는 1864년 함북 명천에서 함북 고산군수를 지낸 이병효의 아들로 출생했다. <남병영기사>를 보면 그는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로 양반출신이다.

이용익이 고종 때 관계로 진출한 것은 임오군란 때 여주 장호원으로 피란 간 민비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첫 관직인 함경도 단천부사 시절 그가 관할하는 광산에서 징수한 세금이 전임자의 10여배나 되어 '광산경영의 귀재'로 인정받은 뒤, 전국 광산의 관리책임자로 승진한다.

이용익의 경영철학은 양반들의 책상머리 경영과 달리 발로 뛰며 확인하는 현장경영이었다. 서울에서 개성까지 직접 오가며 홍삼 제조를 감독하고 세금징수를 독려하는가 하면, 일본인들의 인삼밭 도적질을 외교력으로 저지하는 수단도 쓸 줄 알았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지금의 조폐공사인 전환국 초대국장과 철도사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두 기관을 본 궤도로 올려놓고, 1899년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으로 발탁되었다.

고종은 원래 고위관직자를 한 자리에 오래 두지 않았으나, 이용익의 경우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1904년 배일친러파로 일본으로 납치될 때까지 내장원경직을 유지하였고, 지감의 내무부장관, 지방법원장, 헌병사령관, 감사원장을 비롯하여 서북철도국총재, 군부대신까지 겸직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시샘을 받을 만했다.

1905년 귀국, 경북관찰사에 등용되었는데, 그 동안 보성사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설립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그 후 군부대신에 기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육군 부장이 되어 일제 세력의 축출을 위하여 프랑스, 러시아 세력과의 제휴를 꾀하라는 황제의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가던 도중 풍랑으로 중국 산둥성 옌타이에 기항하였다가 현지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는데, 책임추궁을 두려워한 본국 정부에 의하여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충숙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용익은 기업이나 정부조직의 운영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열강 세력을 교묘히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일각에서 그를 친러파로 치부하지만, 그는 주한 일본군 총사령관 하세가와와도 절친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이 전쟁터로 변할 것을 우려하여 밀사를 해외로 파견해 '중립군 선언'을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기와 외국도서를 구입해 지식을 보급했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와 보성중학을 설립해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을 꾀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해 전통 회계방식으로 결산서를 남긴 것은 귀중한 자료다. 독립운동가 윤효정은 <풍운한말비사>에서 이용익은 한평생 그만한 재정권을 가지고 황실재용을 독단하야 지냈으니 응당 기천 기백석의 추수가 있으리라 추측하였는데, 그 자손을 위한 경영이라고는 공공무여한 것은 세인이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이며, 보성전문을 위시하여 각 학교에 수십만 원을 지불하였다고 적고 있다.

혼란한 시대의 충신이자 교육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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