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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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9. 외척으로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친 김석주

이근호 webmaster@kyeonggi.com 노출승인 2016년 11월 28일 13:48     발행일 2016년 11월 29일 화요일     제0면


▲ 김석주초상(실학박물관 소장)
왕실의 외척 가문, 청풍 김씨
김석주(1634~1684)의 본관은 청풍으로 자는 사백(斯百)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다. 김석주가 속한 청풍 김씨는 중종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사림 세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던 김식(金湜)의 후손들이다. 청풍 김씨의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은 인조대 김육(1580~1658) 때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김육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는데, 이는 1651년 김육의 둘째아들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이 왕세자(후일의 현종)의 빈으로 간택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청풍 김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되었다.

김석주는 세자빈(후일의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이다. 김석주는 1662년(현종 3) 3월 과거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문신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吏曹)의 관직에는 쉽게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조의 6품직 좌랑에 진출한 시기는 1670년(현종 11)으로, 이조 관직에 나오는데 약 8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비슷한 시기 김수항(1629~1689)이 1651년(효종 2) 과거 급제 후 약 3년 정도가 지난 1654년(효종 5)에 이조 좌랑에 제수된 것을 보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김석주의 이조 관직 진출이 늦어진 것은 외척이라는 이유와 함께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의 대립이 주요한 이유였다. 송시열과의 대립은 가정사에서도 확인되는데,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 사후에 장례를 치르면서 수도(隧道)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송시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수도란 묘를 조성하면서 관이 있는 곳까지 굴을 뚫고는 문을 달아서 출입하게 하는 길을 말하는데, 신하의 무덤에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송시열 등은 이를 참람된다며 비판하였다.

이런 갈등이 내재된 상태에서 1674년(현종 15) 이른바 제2차 예송(갑인예송이라고 함)이 발생하였다. 2차 예송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국상 때 앞서 1차 예송과 마찬가지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그런데 이때의 논쟁은 앞선 제1차 예송논쟁 때 문제로 파급되었는데, 이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이 김석주이었다. 예송의 결과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 과정은 김석주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 청풍김씨족보(실학박물관 소장)
환국정치의 포문을 열다
현종 말년 남인 허적이 영의정에 임명되면서 서서히 남인들이 조정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숙종 초반 남인 정권은 한계가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상 김석주의 주도에 의한 것이기에 권력의 핵심에는 김석주가 위치하였다. 김석주는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더욱 입지가 공고해졌다.

이를 반영하듯이 김석주는 숙종이 즉위한 직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는 한편 중앙 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의 장관인 수어사를 비롯해 군사 행정을 책임지는 병조판서와 역시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제조직을 겸하였다. 


숙종의 경우는 권력 운영 과정에서 특히 군권은 모후의 사촌 오빠인 김석주를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동시에 장인인 김만기에도 호위대장의 직책을 주어 자신의 신변 호위를 맡겼다. 권력 운영에서 군사력의 문제는 정권 안정의 물리적 기반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군사력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남인 정권은 왠지 불안한 측면이 있었다.

군사력을 두고 각축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남인은 도체찰사부, 약칭으로 체부라는 기관을 통해서 군사적인 약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남인 측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김석주의 반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김석주는 자칫 군권의 집중으로 남인의 권력이 비대화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사실 김석주의 지지 기반은 서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사감으로 현종 말년 이들을 정권에서 축출하였던 것이지, 남인 정권의 영구화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김석주는 자신의 심복을 시켜 남인 측의 의심스러운 일들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확보하였고, 그 결과로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로 정국을 구성하였다. 

이것이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이다. 정권 교체의 직접적인 계기는 천막 문제이지만 이미 충분히 사전 작업이 진행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같은 배경에는 김석주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김석주의 행태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의 입장에서 볼 때 김석주는 악역을 자초하며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친 “국궁진췌(鞠躬盡? , 국사를 위해 몸을 바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 청풍김씨족보(실학박물관 소장)
군역 문제 해결에 주력하다
김석주가 속한 청풍 김씨는 경세론에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조부인 김육은 치열한 논쟁 속에 조선 사회에서 대동법이 정착되는데 공헌하였다. 부친 김좌명은 현종 연간 전라도 산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할 때 이를 주도하였다. 당시 “이 일을 담당할 만한 자는 김좌명 밖에 없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김좌명에게 맡기면 아버지 김육의 뜻을 잘 이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석주는 당시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군역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였다. 군역은 인정(人丁)을 단위로 부과하던 역으로, 김석주가 생존하던 시기에 이미 군역의 폐단으로 알려진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석주는 이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호포제(戶布制)를 주장하였다. 가호별 인구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징수하자는 것인데, 이는 군역의 부과 기준을 인정에서 가호(家戶)로 옮겨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의 시행을 놓고 관직자에게 징수하면 “군자와 야인의 구별이 없어지며 명분이 점차 무너질 것이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김석주는 인정에 대한 신포(身布)로 징수하면 그럴 수 있겠으나 자신의 주장은 가호를 단위로 징수하는 것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호포제를 시행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육과 김좌명이 대동법을 주관하였듯이 호포제에 대해서는 김석주에게 관장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기도 하였다. 김석주가 주장한 호포제는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군역 문제 해결 방안으로 제시된 호포론의 선구적인 논의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글_이근호 명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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