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동김씨 돌림자

(구)안동김씨

오르막내리막 2015. 11. 28. 11:28

 

김학묵

동의어 전직 복지기관단체인, 전직 정무직공무원, 전직 연구직공무원 다른 표기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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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출생 1916년, 충북 음성
사망 사망
직업 전직 복지기관단체인, 전직 정무직공무원, 전직 연구직공무원
학력 하딩대학교

제공처

Joins인물정보
2011.10.24

 

나비넥타이의 노신사 고 김학묵 회장님을 추억하며

꺽지 못할 의기와 호탕한 웃음 뒤엔 늘 너그러움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5-25 01:06:241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지표가 되어줄 만큼 존경하는 분이 있는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다. 내게도 그런 분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이 바로 이 땅에 재활이라는 용어를 뿌리내리게 한 고 김학묵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전회장님이다. 뇌성마비인들의 재활과 복지는 물론 우리 나라 사회복지계의 선각자이며 최고 어른으로 계시다가 2년전 2001년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꼭 10년을 곁에서 모신 분이다

타고나신 건강에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지닌 눈빛과 목소리로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노신사, 빨간 나비넥타이와 중절모가 잘 어울리고 그 멋있는 외모에 걸맞은 매력과 유머를 지닌 그 분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나비넥타이를 즐겨 매는 노신사의 매력과 유머를 늘 지니셨던 김학묵 회장님은 누구도 꺽지 못할 의기, 호탕한 웃음 뒤에는 너그러움이 늘 숨겨져 있어 늘 사람을 감싸주는 정다운 분이셨다.

늘 책을 가까이 두시고 새 지식과 새 생각들을 얻고자 노력하셨으며 "일신 우일신" 하라고 쩌렁쩌렁하게 호통치던 음성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언젠가 한번은 요사이는 살기가 어려운지 남을 돕는 일에 그리들 관심이 없다고 원망 섞인 말씀을 드렸더니, 김학묵 회장님은 세상 인심 탓하지 말라. 오히려 남의 인심이 나의 인심보다 낫고 모든 인간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네 자신 스스로가 먼저 실천하라고 호되게 야단을 치신 적이 있다.

결재를 맡으러 가면 뇌성마비인들에게 무엇이든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 아무리 불편한 몸이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한가지의 재주는 꼭 있는 법이니 그것을 잘 발견하여 계발하고 살리는 게 중요하며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하였다.

지난 5월 15일 돌아가신지 2주기를 맞이하였는데 김학묵 회장님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이제서야 충북 음성에 있는 그 분의 묘소에 다녀왔다. 그분이 마지막 세상과 이별하시던 눈물로 받쳤던 시가 그 분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내게 이 한편의 시를 바칠 수 있게 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과 뜻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어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먼길 가시는 당신에게
- 중략 -
"당신은/우리에게 꿈과 희망의 싹을 틔워 주셨지요. / 이제 가지를 제법 뻗은 나무로 자라나 / 당신의 그늘이 되어드리기 위해 고개를 드니/당신은 이별의 손짓을 하며 먼길 가시려 합니다/ ' 이 생명과 힘을 눌린 것을 쳐들고 굽은 것을 펴는데 쓰리로다, 부리리로다' 하신 당신의 말씀만이 떠나신 자리에 더욱 형형 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 - 중략 -"

2년전의 그분의 떠나가심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눈물은 이제는 가셨지만, 아카시아꽃 향기 흩날리는 5월이 되면 병석에서까지 뇌성마비인들의 재활에 고심하셨던 그분의 참사랑과 봉사의 실천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시어들이 비바람에 씻겨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분의 의지와 뜻, 살아오신 흔적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초석이 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최명숙(cmsook1009@naver.com)

 

 

 

고 김학묵 이사장 공덕비 건립 추진
감곡면 왕장리 체육공원
2001년 12월 26일 (수) 00:00:00 김요식 yskim@usnews.co.kr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뇌성마비협회이사장을 역임한 고(故)김학묵의 공덕을 추모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한 공덕비 건립을 추진 하고 있다.
감곡면 왕장리 체육공원에 건립 추진중인 공덕비는 각급기관단체와 사회단체의 성원으로 추진하고 관내주민뿐아니라 외부인들도 볼 수 있는 체육공원을 선택해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 할 계획이다.
이번 공덕비 건립은 총 9백여만원이 투입되고 규모는 3단으로 제작 되며 1단은 가로 2백55cm, 세로 60cm, 2단 가로 2백25cm, 세로 45cm, 3단 가로 1백80cm, 세로 1백20cm 건립할 예정이며 2001년 12월에 착공에 들어가 2002년 3월에 준공 예정 이다.
고(故)김학묵은 1916년 감곡면 상평리에 태어나 감곡초교를 졸업하고 1983년 3월에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여 1961년에 미국 아칸사주 하딩대학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8년 서울특별시 비서관으로 관계에 진출한 고(故)김학묵은 1960년 보사부 차관, 1972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역임, 1978 한국뇌성마비협회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계평화 복지, 박애 정신을 구현한 거목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남북적십자회담을 최초로 성사시킴으로서 남북대화의 장을 실현 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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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학묵 한국 뇌성 마비 복지회장의 발자취보사부 차관 지내면서도 전셋집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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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5.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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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뇌성마비 복지회 故 김학묵 회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보사부 차관을 지낼 정도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전셋집에 살만큼 청렴한 공직자였다.
더욱이 한국 뇌성마비 복지회장을 맡아 사회에서 편애하던 뇌성마비 가족들에게 30여년동안 재활과 복지증진을 위해 정열을 바쳐 온 실천가였다.
올바른 삶의 대한 근본적인 실행 덕목을 효라고 생각하여 효의 실천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온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에 본보에서는 지난 5월15일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故 김학묵 한국 뇌성마비 복지회장의 발자취를 살펴 보았다.

- 편집자 주 -

故 한국뇌성마비복지회 김학묵 회장은 우리나라에 사회복지란 개념을 첫 도입한 학자였으며, 보사부 차관을 지내면서도 전셋집에서 살았던 청렴한 공직자였다.
아울러 한국뇌성마비 복지회장을 맡아 30여년간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재활과 복지증진을 위해 정열을 바치며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삶을 영위해 왔다.
고인은 1916년 충북 음성군에서 일제시대의 민중계몽단체 ‘자강회’의 발기인이었던 김상범(金相範)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金공이 위암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과 편집국장을 지내서인지 고인의 집안에는 유난히 신문, 방송인이 많다.
동생 주묵(周默)씨가 조선일보 정치부장, 경향신문 상무를 지냈고, 큰 아들 재형씨는 KBS대하사극 ‘용의눈물’을 연출한 한국의 간판급 PD다. 둘째 아들 재휘씨는 춘천일보 사장을 역임했고, 넷째 아들 재연씨는 인기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 ‘체험 삶의 현장’등을 연출한 PD다.
휘문고보와 보성전문 법학과를 나온 고인도 짧게 나마 경성방송국에 아나운서로 몸을 담았다.
하지만 음악프로그램 진행중 창(唱)을 부르러 나온 기생을 소개하면서 여사라는 호칭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일자 “사람 차별하는 곳에서는 일할 수 없다”며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후 경기도 사회과장으로 공직에 들어간 그는 해방과 더불어 유엔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런던대에서 사회보장 제도를 연구했다.
유학 중 경기도 근무시 그를 눈여겨 본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람아, 빨리 나와 배운 것 좀 써먹게”하고 독촉하자 51년 1.4후퇴 때 귀국했다.
그는 보성전문 선배인 허정씨 밑에서 사회부(현 보건복지부)구호과장을 맡아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를 조달해 배분하는 중책을 맡았다.
허정 과도정부하(60년)에선 보사부 차관까지 지냈다.
65년 저술한 사회사업 개론은 이 분야 최초의 교과서로 기록돼 있고 71년 남북적십자 회담 때는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회담을 진두 지휘했다.
72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생을 뇌성마비 장애인들에게 바쳤다.
수많은 장애인이 “가고 또 가면 다다름이 있고, 하고 또 하면 이름이 있다”는 그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셋째 아들 재덕씨가 신경이 썩어 들어가는 베세토씨병을 앓기 시작해 연세대 재학 중 시각장애인이 됐다가 8년간 투병 끝에 77년 스물 여덟살의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 사연은 KBS에서 ‘소망’이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84년에는 15세때 동갑내기로 결혼해 63년간 해로해 온 부인 이영수씨를 먼저 떠나보냈다.
“내가 ‘첫날 밤 감상이 어떻소’하고 묻자 너의 모친 대답이 ‘생감은 왜 찾나요’ 였지”
평소 자식들에게 그는 스스럼없이 첫날밤 얘기를 들려주면서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곤 했다.
그는 부인을 땅에 묻으면서 이렇게 마지막 연애편지를 썼다.
‘그대의 것, 나 김학묵은 아뢰오. 그대를 묻으니 나의 가슴 찢어지는 구려.
이제 나 혼자 남았지만 사회봉공을 계속하다가 하느님이 부르시면 그대 옆으로 내 가겠소. 너무 외로워 말구려.
나의 사랑아. 어찌 당신을 꿈엔들 잊으랴.’
그는 부인의 무덤가에서 한 약속대로 지난 3월말까지 사무실에 나가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다 삶을 마감했다.

< 추 모 시>

김학묵 회장님 靈前에
최 명 숙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아카시아 꽃 만발한 이 5월에
당신은 먼길 가려 합니다.
당신이 가는 길을 환히 밝히려
하얀 그 꽃들은 자꾸만 떨어지고
우리들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납니다.

나비넥타이와, 중절모, 왼손의 지팡이
한결같은 그 모습으로 우리들을 포옹하던 당신은
우리들 서로가 모이고 모여서
가고 가고 또 가면 다다름이 있을 것이니
굳건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오뚝이들의 재활의 꽃을 활짝 피워
밝은 내일, 복된 삶을 가꾸어 나가자고
꿈과 희망의 싹을 틔워 주셨지요.

이제 가지를 제법 뻗친 나무로 자라나
당신의 그늘이 되어 드릴 날이 언제인가
헤아리며 고개를 드니
당신은 이별의 손짓을 하며
먼길 가려 합니다.

이 생명과 이 힘을
눌린 것을 치들고 굽은 것을 펴기에
쓰리로다, 부리리로다 한
당신의 깊은 뜻과 말만은
당신이 떠나신 자리에 남아
더욱 형형하게 빛나고
당신을 그려 흘리는 저 많은 이들의 눈물로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재활의 꽃 활짝 피우고
이 사회의 안락을 이뤄 나가는
커다란 숲으로 자라니
편히 가소서, 편히 잠드소서.

< 애도의 글>

부모에 대한 효를 늘 강조
한국 뇌성마비 복지회 김학묵 회장 영전에
매괴신협 최광복 이사장

항상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의 안위보다도 사회에서 소외되고 불우한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간 한국 뇌성마비 복지회 고 김학묵 회장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본보기로 보여준 정말 자랑스런 음성인입니다.
고 김회장의 선친께서는 김회장에게 부모란 정의를 자기를 낳아주신 분들도 부모요 자기를 길러준 분들도 부모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느 토인비가 일찍이 "한국 사람들이 인류 문화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인들의 효사상과 실천이다"라고 할만큼 효사상은 한국 문화에 지대한 정신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효의 근원을 샤머니즘(무속주의)이라 보고 최근들어 효를 무시하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인 박애,인의를 무시하는 잘못된 언행이라고 지적해왔습니다.
이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부모 이외의 다른 이한테 미친다면 그것을 곧 애타주의라고 하니 다시 말해 노인에 대한 경로요, 고아에 대한 애육등등이니 한마디로 표현하면 효를 박애라고 강조해왔습니다.
고 김회장은 늘 서글서글한 성격에 애향심이 두터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뇌성마비 가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고 김회장은 수구초심이란 한자 성어가 말해주듯 늘 고향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분입니다
남을 위한 애타주의 즉 박애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준 고 김회장은 이제 고향의 품안에 안겨 물질만능주의로 치닫는 현대인들에게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묵시적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제 편안히 영면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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