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계표

양원왕

오르막내리막 2014. 7. 3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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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왕 (陽原王, ?~ 559년, 재위 : 545년 ~ 559년)은 고구려 의 제24대 군주 이다. 안원왕 의 맏아들이고, 휘 는 평성(平成)이다.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양강왕(陽崗王)이라고도 한다. 안원왕의 맏아들이다.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였다. 장성해서는 남달리 호방하였다.

이름은 양성(陽成) 또는 탕(湯). 일명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평강왕(平岡王)· 평국왕(平國王)이라고도 한다. 양원왕의 장자로 태어나 557년(양원왕 13) 태자가 되고, 559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하였다.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고구려 양원왕(陽原王)7년에 거칠부가 장군이 되어 죽령(竹嶺)이외 고현(高峴)이내의 10국을 점령할 때 혜량이 고구려를 탈출하여 내려온다.

양원왕(陽原王) 8년에는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며, 552년부터 짓기 시작한 장안성(長安城)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가진듯 하지만 양원왕 이래 북조와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북주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공격하여 왔을 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싸웠다.

고려로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하도록 하였는데 고려에서 이에 응하지 않자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양원왕을 주먹으로 쳐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고려 신하들은 겁을 먹고 감히 나서지 못했으며 5천호의 유민을 돌려보냈다.

동북아의 맹주국 고구려는 드넓은 영토를 많이 잃고 말았다.결국 양원왕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쪽 영토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함경북도 지역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양원왕 때의 상황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몽고 고원의 주인공이 유연족에서, 돌궐족으로 바뀌고 이 돌궐족은 징키스칸이 몽고고원을 통일하기 전에는 제일 큰 부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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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4대 국왕[생몰년: ?∼559(양원왕 15), 재위: 545∼559].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이라 했으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안원왕(安原王)의 맏아들로 533년(안원왕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안원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양서(梁書)』에는 양원왕의 즉위년이 548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대로 545년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양원왕의 즉위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 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충돌과정에서 양원왕(陽原王)을 밀던 추군(麤群)이 다른 왕자를 지지하던 세군(細群)에게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전제적 권한이 크게 도전받아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삼국사기』거칠부(渠柒夫) 열전을 보면 551년(양원왕 7)에 거칠부를 만난 고구려의 고승 혜량(惠亮)이 나라에 정란이 있어 멸망이 멀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되어 있어 지배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량이 거칠부를 만나서 망명의 뜻을 표시하고 몇 년 뒤 거칠부가 이끈 신라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해 왔을 때 거칠부를 따라 신라로 이주해 갔다. 혜량의 경우는 양원왕 즉위 이후 여전히 지배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혼란이 혜량이 주석하고 있던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557년에 환도성(丸都城)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을 꾀했는데 이 역시 고구려 내부의 동요를 보여준다. 간주리로 대표되는 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의 대립이 분출된 것이다. 이 또한 양원왕 즉위와 관련된 귀족세력 간의 분쟁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왕권의 동요와 더불어 국제관계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북아시아의 신흥 유목 기마민족인 돌궐(突厥)이 551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장군 고흘령(高紇領)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들을 크게 격파했으나, 돌궐과의 대치로 고구려는 매우 큰 국력소모를 겪었다. 돌궐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551년에는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중국과는 동위(東魏) 및 동위를 계승한 북제(北齊)와 교류를 계속하였다. 55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552년 북제의 사신 최유(崔柳)가 무례한 행동을 보이고 553년에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던 거란족(契丹族)에 대해 친정(親征)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적 위기상황 하에서 고구려의 귀족들은 서로 간의 분쟁을 중단하고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을 형성했다. 즉, 실권직인 대대로(大對盧)를 유력 귀족들 사이에서 3년마다 선임하고 중임할 수 있는 형태로 개편함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귀족 간의 타협과 연립을 통한 정권의 안정적인 지속을 도모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위서(魏書)』
  • 『북제서(北齊書)』
  • 『북사(北史)』
  • 『양서(梁書)』
  • 『일본서기(日本書紀)』
  • 『고구려 불교사 연구』(정선여, 서경문화사, 2007)
  • 「6∼7세기 정치 세력의 동향과 귀족 연립 체제」(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004)
  • 「귀족연립정권의 성립」(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 「5∼6세기(世紀) 동(東)아시아의 국제정세(國際情勢)와 고구려(高句麗)의 대외관계(對外關係)」(노태돈, 『동방학지(東方學志)』44, 1984)
  • 「고구려(高句麗)의 한강유역상실(漢江流域喪失)의 원인(原因)에 대하여」(노태돈,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13, 1976)
  • 「고구려(高句麗)의 요서진출기도(遼西進出企圖)와 돌궐(突厥)」(이용범, 『사학연구(史學硏究)』4,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