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김씨
김시습 기념관
오르막내리막
2013. 11. 22. 21:09
강릉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 |
기사입력: 2008/05/12 [12:03]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288-1번지
강원 강릉시가 전통문화시범도시 및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경포도립공원내 매월당의 貫鄕(관향)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강릉에 건립하였다.
본관 江陵(강릉). 자 悅卿(열경). 호 梅月堂(매월당), 東峰(동봉), 淸寒子(청한자), 碧山(벽산). 법호 雪岑(설잠). 시호 淸簡(청간).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私邸(사저)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神才(신재)로 이름이 높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金鰲新話(금오신화)를 창작하셨다.
매월당 김시습(1435~ 1493)은 세종 17년 서울 교외에서 忠順衛(충순위)의 벼슬을 하던 가난한 文人(문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아직 돌도 되지 않았던 어느날, 이웃에 살고 있던 崔致雲(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아기인 김시습에게 문장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한다. 그는 세살이 되자 어려운 한문책을 줄줄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가처동)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는 시를 읊었다고하며,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시의 재상 許稠(허조)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천재적인 표현인가! "너는 과연 신동이로다." 재상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덧 궁중에까지 들어가자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은 5세인 김시습을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들을 시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았다. 시험관의 무릎 위에 앉은 김시습은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시 몇 수를 지어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매우 감동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성종 12년(1481)에 훈련원 都正(도정) 南孝禮(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삼각산 重興寺(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계유정란)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어릴 때 세종과의 약속을 삶의 큰 지주로 삼아 언젠가 세종의 손자인 단종 밑에서 큰 일을 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었던 그인지라, 그 소식은 청년 김시습에게 너무나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방안에 틀어박혀 고민하며 통곡하고 공부하기 위해 가져온 책과 지필묵 등을 모두 깨끗이 태워 버렸을 뿐 아니라 가위로 손수 머리털을 자르고 과거 공부도 포기하고 입신양명의 꿈도 버린 채 분노와 슬픔과 외로움에 겨워 절을 떠났으며, 이 때부터 그는 염세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일개 초라한 승려로 출가와 환속, 재출가를 거듭하면서 전국을 방랑하였다 방랑은 양심과 지조를 지키려는 그 나름대로의 저항이었고, 그의 은둔은 진리를 향한 영혼의 구도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북으로 安市香嶺(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多島海(도도해)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宕遊關西錄(탕유관서록)' '宕遊關東錄(탕유관동록)' '宕遊湖南錄(탕유호남록)등을 정리하여 그 後志(후지)를 썼다.
세조 9년(1463) 孝寧大君(효령대군)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佛經諺解(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세조 11년(1465) 다시 경주 남산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圓覺寺(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召命(소명)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金鰲新話(금오신화)'를 지었고, '山居百詠(산거백영, 1468)'을 썼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儒佛(유, 불)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정조 6년(1782) 이조판서에 추증, 寧越(영월)의 六臣祠(육신사)에 配享(배향)되었다. 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가 있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그때 西江(서강)을 지나다가 어느 벽에 붙은 韓明會(한명회)의 글을 보게 되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 시를 보고 그는 선뜻 붓을 들어 '扶(부)'자를 '亡(망)'자로, '臥(와)'자를 '汚(오)'자로 고쳐 버렸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김시습이 부모를 일찍 여의지 않고 잘 자라 시운만 잘 탔다면 관직에서나 학문에서나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으련만, 모진 운명은 그로 하여금 시대의 뒤안길을 배회하게 만들었다.
기념관에는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실, 매월당문집 영상자료 3개 시설과 학생들이 체험학습할 수 있는 한국인물찾기, 김시습의 나이 3살 때 지은 시를 그래픽화 해 직접 영상체험을 할 수 있는 2개의 시설물이 설치되어있다.
매월당문학사상연구회 소장품 23점과 수장고에 보관중인 24점 등 총47점을 전시. 고서 중 대표적인 전시작품으로서는 金堉(김육, 1580∼1658)이 쓴 己卯綠(기묘록)과 1796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莊陵史補(장릉사보), 180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東鶴寺誌(동학사지) 등이다.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扶餘(부여)의 無量寺(무량사)에서 돌아가셨다. 성종 24년(1493) 어느 늦은 봄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방랑길을 떠났으니, 그해에 그의 나이 59세였다. 무량사의 스님들이 그의 유언대로 장사지내지 않고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에 관을 열어보니 얼굴이 생시와 다름없어서 놀라 성불했다면서, 다비하고 부도를 만들어 세웠다한다. 그의 부도에서 발견된 사리 1과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역사란 이 땅에 태어나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의 행적을 모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 사람으로서는 그들을 직접 만날수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자취를 통해 교훈을 얻고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면, 교과서 등 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생동감 넘치는 '산 역사' 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해본다. 다채로운 문화정보의 쉼터 문화예술분야 선두주자 '문화저널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