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황손 이석

오르막내리막 2013. 10. 28. 05:25

인물탐방: 살아있는 마지막 황손 이석(李錫)본지 단독 취재: 환구단 천정화 130년 만에 용 그림 사진 최초 공개

박주영기자  |  parkjy9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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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29  0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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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반 만년 역사 속에서 선조들의 우수한 창의적 정신과 근면 성실함으로 지금은 세계경제대국으로써 세계인의 부러움과 개발국가에는 룰 모델이 되고 있으면서 한국을 배우고자 연수를 오는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개인적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되면서 우리의 본질적인 정체성과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뒤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개인이나 단체 그리고 국가가 현재의 위치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부모와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단체생활에서의 소속감과 자신의 지위에 맞게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하고 나라가 있어 국민의 안위와 주권수호자로서 우리의 정통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하다 보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는 우(愚)를 범하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후회를 하며 우리의 다음 후손들에게 안타까워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지에 자문해야 하는 것은 아니까 한다.
모나코 공주나 영국의 왕자가 결혼하는 것에 위성으로 생중계를 바라보며 부러움의 시선에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기회도 살리지 못하는 답답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역사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는 뜨거운 열정과 그리움과 감동의 향수(鄕愁)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단절되어 있던 그 정통성을 이어가면서 국민과 후손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세계에 자랑 할 만한 상징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석 황손의 과거, 현재 그리고 꿈

2004년 전주시에서 민가 네 채를 매입해 지은 승광재(承光齋: 빛을 계승하는 집)에서 지내고 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 이석 황손을 본지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Q: 고종황제의 밀서에 그 당시 독도문제가 거론되었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요? 

A: 저도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2010년 10월 25일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에서 110년 만에 고종황제께서 친히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고 천명을 하신 것을 재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독도향우회, 한국시민단체네트워크 그리고 흥사단 주최, 독도칙령주최 11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1900년 10월25일은 고종황제가 독도 영유권을 확인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제정한 날로 그 날 제가 단상에 올라가서 축사를 하면서 고종황제께서 확실하게 독도는 우리나라 땅이라고 천명을 하셨는데 그 역사적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모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Q: 을사조약 원본은 현재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가,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이는지요?
 
A: 미국지사로 있는 한국의 한 언론사에서 취재하여 보도가 되었는데 이번에 미국에 들어가서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집할 수 있으면 최대한 많은 자료를 모을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Q: 안타깝게도 이석이라는 분을 “마지막 황손”이라고 만 일반적으로 국민들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고 젊은 사람이나 어린 학생들은 더 더욱 모르고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제가 알기로는 1945년 해방이 된 다음에 초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당신 자신도 전주이씨고 양녕대군 후손이라는데 왕실을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라는 족보 찍는 출판사에 있었데요. 그래서 거기서는 출판사라고 해서 대궐을 못 들어 갔답니다. 그러다 해방 이후 이승만박사가 부인 프란체스카를 데리고 오고 기독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제사인 종묘제사에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전주이씨들의 하나의 드라마와 같은 장난이 50년이상 60년을 내려오고 있어요. 그러니깐 전주이씨 중에 효령대군, 양녕대군 같은 사람한테 “자네 돈 얼마 벌었어?” “그럼 돈 좀 내고 왕관 쓰고 초혼관에서 장례식을 해라” 이것이 현재 60년째 하고 있어요.
      옛날에 역대 국왕의 계보와 초상을 관장하고 국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고 왕실의 각 계파를 감독하는오상사(五上司)의 하나였던 제군부를 개칭한 것을 고종 원년(1864)에 종부시를 이에 합속시키고 종정부로 개편되었던 자리가 경복궁 옆 박정희 대통령이 총상입고 옮겨졌던 수도육군병원과 옛 기무사 터 자리에 있었는데 그 곳에 행방 이후에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왕실의 정체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친왕의 직계아들 아닙니까? 그러면 그 직계 왕세손들을 관리하는 종친부가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지는 바람에 종약원으로 그냥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깐 대동종약원은 전주이씨 500만의 뿌리지요, 각 13도에 흩어져 있는 전주이씨의 뿌리이지요, 그 뿌리들이 해방 이후에 전주이씨 직계 정체성을 만들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을 왕의 직계후손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겁니다.
      왕손들이 법을 알겠어요, 따질 줄도 모르고, 세상을 모르니깐 억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제 위의 형님께서 열 분이 계신데 궁에서 쫓겨 나가시고 다 미친 사람처럼 살다 돌아 가셨어요. 제 바로 위의 형님을 만나서 손을 잡고 “형님” 하면 그냥 눈물부터 나와요. 그러면서 형님은 “역사 이야기는 하지 마라”, “우리는 슬픈 왕손들이다” 하면서 수원에 있는 평화수녀원에서 장가도 못 가시고 우시다가 74세에 돌아 가셨습니다.
      저는 그나마 부초와 같이 세상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사회에 융화되고, 국민들도 나를 좋아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70이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Q: 미국의 WP(Washington Post)지에 이석 황손이 미국에 건너가셔가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고 보도가 되었는데 미국을 간 계기와 미국생활은 어떠셨는지요?
 
A: 제가 대한민국을 떠난 것이 1979년 12.26 사태가 나고 박정희대통령이 돌아가시자마자 군부에서 헌병 트럭으로 그때 제가 효자동 옆, 청와대 옆의 칠궁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장희빈사당, 거기가 조선왕조 때 일곱 분의 왕비가 상궁으로 들어가서 왕자를 낳았는데, 그 왕자들이 임금이 되신 분이지요. 그때 그 분들이 숙빈, 엄빈, 순헌귀비, 수빈, 영빈, 희빈, 인빈 이렇게 해서 일곱 분이 돼요. 장희빈이 중요인물이고 마지막에 들어오신 분이 작은아버지의 아버님, 영친왕의 어머님 엄빈이예요. 그 분이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 진명여학교(현. 진면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를 만든 분입니다.
    그래서 거기 있다가 10.26사태가 나고 재가 쫓겨나게 돼서 1979년 12월 9일날 우리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를 들어오지 않겠다고하고 떠났다가 꼭 10년만에 89년 5월 달에 마지막 왕비 이방자 왕비가 물론 일본에서 태어나신 공주왕비지만 우리나라의 마지막 왕비이고, 제가 조카가 되니까 국모의 장례식에 가야 되겠다 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21년 째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의 생활이 여행으로 끝내려고 했어요. 3개월 정도 지내다가 미국이 넓고 좋아서 여행을 하다가 불법체류자가 되었어요. 여권이 만기가 돼서 불법체류자로 4년 정도 있다가 84년에 어렵게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을 하루에 16시간을 했어요. 아침 6시부터 일어나서 커피 한잔 마시고 남의 집 잔디 깎아주고, 부잣집 가서 수영장 청소해주고, 빌딩청소하고 저녁에는 권총차고 보디가드 서 주고해서 돈을 좀 모아서 자그마한 가게를 하다가 많은 강도를 13번이나 당하게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때 LA 흑인폭동사건이 일어 났어요. 돌아오게 되면서 89년에 저를 살려주려고 하셨는지 이방자여사가 돌아가시게 되고 제가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Q: 베트남전쟁에도 참전을 하였다는데 어떤 계기로 참전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임무는 무엇이었는지요?
 
A: 베트남 전쟁에는 제가 사연이 있습니다.
    64년도에 저를 아끼셨던 큰어머님(순종황제 왕비) 윤대비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제가 천호동에 있는 워커힐 호텔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배인이 장례식에 가지 말고 노래하라는 거예요. 거기에 외교관 파티가 많아서 내가 영어로 사회를 보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니 영어로 사회를 보라기에 내가 지배인에게 당신 우리나라 사람이냐? 옛날 같으면 왕비다. 임금께서 돌아가시면 석 달 열흘 장으로 백일장을 하는데 왕비이므로 한 달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한 달 동안 노래를 못하게 되었네 그랬는데, 지배인이 안 된다고 해서 그럼 내가 굶어 죽어도 노래 안하고 그만두겠다고 하고, 65년도에 월남 파병부대 해산진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월남의 맹호부대 사단장이셨던 최명길 사령관이 오셔서 편지를 수셨었습니다. 군대 안 간 연예인 중에서 몇 명을 뽑아서 특수훈련을 시켰습니다. 월남 말을 가르쳐 가지고 월남에 와서 월남 마을에서 월남 말로 노래를 해 주면 월남 사람한테서 정보가 들어 온다고요. 그래서 그 때 논산훈련소에 65년 4월 2일 날 입대 해 가지고 월남에 가서 2년을 있었지요. 그때 공로가 많았어요. 최명길 사령관이 정보작전을 하셔서 성공을 많이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최사령관님께서 통합사령부로 오시게 되고 제가 처음에 간 부대 이름이 비둘기부대예요. 그래서 제가 부른 노래가 ‘비둘기 집’이예요.
당시 원호처의 ‘Special Service’라고 해서 정보원으로 근무를 했었습니다.    
 
Q: 현재 숭례문 복원 사업에 고문으로 활동 중이신데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지요?
 
A: 네, 2008년도에 효창공원에서 있는 김구 선생 기념관에서 숭례문이 불탔다고 해서 박찬종의원도 오고 각 민족단체 대표들이 거기서 숭례문 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저를 고문으로 올렸어요. 숭례문은 나라의 대문, 서울 한양의 대문 이다 해서 숭례문이라는 현판을 쓰신 것도 양녕대군 할아버님이신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황손이 참여해서 2012년에 완공이 된다니까 우리 한번 결성을 해 봅시다 해서 고문 직을 수락 했습니다.
 
Q: 여러 곳에서 강의도 하신다는데 주로 어떤 강의를 하시는지요?
 
A: 한국에 미국에서 들어온 후 한 15, 6년 동안 우리나라 팔도강산을 다녔습니다. 혼자 운전을 해 가면서 경찰대학교, 공무원 연수원, 중학교, 고등학교, 로터리클럽, 라이온스클럽 등 여러 단체에서 초청만 들어오면 모두 가서 강의를 다 했습니다.
강의 내용은 주로 제가 태어난 사동궁이라는 서울의 조계사 앞에 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41년도에 태어났지요. 태어나서부터 생활하던 일들 상궁들이 나에게 아씨마마, 애기마마 했던 이야기부터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상궁들이 도시락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걸 먹고 나면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도 백성이 어떻게 궁중음식을 먹을 수 있냐고 그러고, 운동회 날 내가 반바지를 입고 준비를 하려고 하면 상궁들이 ‘아니 되옵니다’ 하고 ‘아씨마마는 뛰시면 큰일 납니다’ 해서 교장 선생님이 대신 뛰어 주고 그랬어요.
 
Q: 마지막으로 특별히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A: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욕심 같아서는 50년은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역사를 알아야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오 천년, 만년의 역사 또 가까이는 600년 우리 조선 왕조의 역사가 있었는데, 심지어는 학생들이 역사를 몰라요, 제가 한 2년 동안 전주에서 교양국사를 가르치는 역사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1,2학년 학생들이 태.종.태.세.문.단.세 이외에는 아는 학생들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상궁들이 가져다 주는 도시락을 먹었다고 하면 만화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하고 그런 건 수능 시험에 안 나온다고 그러고 그러면서 한 2년 역사 강의를 하면서 머리가 하얘졌답니다.  
      국민들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아름다운 나라, 단일민족, 백의민족이 다시 뭉쳐서 힘을 합하면 통일도 됩니다. 서구에서 들어온 개인적인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한마음으로 뭉치면 우리민족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민족이기에 세계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뭉쳐야 됩니다. 이걸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환구단 천정화 용그림 130년 만에 사진 최초공개

환구단은 1967년 07월 15일 사적 제157호로써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에 있는 조선시대의 제단이며 원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둥근 단을 지칭한다.

국왕이 정결한 곳에 제천단을 쌓고 기원과 감사의 제를 드리던 의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전통적으로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壇)과 여러 용추(龍湫: 폭포수 아래의 깊은 웅덩이)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나라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이후 여러 차례 제천단을 폐한 일이 있었던 것을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천자가 되었기에 완전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 고종황제의 명으로 용포의 용 발톱이 청나라가 자신들만이 황제라 하여 우리나라의 용포에 용의 다섯 발톱 중에 두 개를 못쓰게 하고 세 개만 쓰게 하였던 것을 고종이 황제로 등위 하면서 용의 다섯 발톱을 복원하였고 황포도 못 입게 하고 적포와 청포만 입게 하였던 것을 대한제국이 생기고 나서 고종황제가 입으면서 황제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도 했다.

환구단은 1897년 우리 나라도 천신(天神)에게 제를 드려야 한다는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따라 영선사(營繕史) 이근명(李根命)이 지관(地官)을 데리고 지금의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다 길지(吉地)를 정하고 제단을 쌓게 하여 임금이 원구에서 천지에 제를 드리고 황제위(皇帝位)에 올랐던 곳이다.
이 때에 조성된 환구단의 제도를 보면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는 제1층 북동쪽에서 남향하여 있고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북서쪽에서 남향하였다.
제2층 동쪽에는 대명(大明), 서쪽에는 야명(夜明)의 위가 봉안되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嶽)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위와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 : 다섯 鎭山)사독(四瀆 : 나라에서 위하던 대천(大川)사토(司土)의 위가 모셔졌다.
그리고 제를 올릴 때 영신궁가(迎神宮架)에는 중화(中和)의 악, 진찬궁가(進饌宮架)에는 응화(凝和)의 악 등, 여러 주악이 의식에 따라 연주되었다.
그 뒤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고, 원구 황지기 위의 동남에 배천(配天)하였다.
1913년 일제에 의하여 환구단이 헐리고 그 터는 지금 조선호텔이 되었는데,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기단 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12층은 통층(通層)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가 있으며 3층은 각 면에 3개의 창을 냈다.

살아있는 후손 이석 황손의 얼굴 모델로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제작

우리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나라와 국민의 권위를 세워주었던 성군으로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문화의 자존감과 우수성의 상징물로써 세종대왕의 동상의 높이는 6.2m, 폭 4.3m, 그리고 20t의 무게로 4.2m 높이의 기단에 6일 새벽에 설치되고 드디어 2009년 10월 9일에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왕 동상이 제막되었다. 동상 축소모형을 제출한 다섯 명의 초청작가중에서 홍익대학교 조소과 김영원 교수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동상 제작 당시에는 13t의 점토가 사용되고 10원짜리 동전 3200만개 정도 분량인 22t의 청동이 쓰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왼손에 올려져 있는 책은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한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인 '훈민정음 해례본' 이며 펼처져 있는 것은'용자례편'이다.

김영원교수는 온화하고 미소 짓는 표정으로 품격 있고 지적이고 자상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작업이 어려웠으며 여러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도 같은 표현을 만들어야 했기에 더욱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세종대왕이 54세 때 돌아가셔서 많은 업적을 구상하고 완성하였을 40대 후반 때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래서 만 원권 초상화, 태조 이성계, 영조대왕, 고종 그리고 마지막 황족인 살아있는 이석 황손 등 여러 사람의 이미지를 참고로 하였다고 했다.

특히, 살아 있는 이석 황손의 모습을 참고로 하였기에 현재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의 용안의 모습이 이석 황손과 많이 닮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어진은 6.25전쟁 당시 피난 가서 불타서 없어지는 바람에 세종대왕 동상에서의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도 복식 전문가인 단국대 박성실 교수가 임금의 옷을 복원하고 문헌과 자료조사를 통해 속옷, 저고리, 액주름, 철익, 답호 그리고 곤룡포 등 6겹 이상을 입은 모델 놓고 동상 제작에 참고하였다고 했다.

시대적으로 후세에 계승 발전 시켜야 할 것들은 역사의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도 승화하여 새로운 미래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아가는 성숙된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정리하지 못하는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에게 과거청산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취재: 윤여진/박주영기자
사진: 유용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