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사
경술국치
오르막내리막
2013. 4. 30. 17:51
독자칼럼]98년전 오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경술국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은 제2차 대전 패망 40주년 식사(式辭)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는 말을 했다. 바이츠제커의 말은 독일인의 반성을 촉구한 말이니 그 의미를 달리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역사의 본질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박광민 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오늘(29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전후의 혼란, 을미년 명성황후가 왜의 흉인(凶刃)에 잔인하게 시해당했을 때 이미 망국의 맹아는 크게 자라고 있었다. 당시 열강과 손을 잡고자 했던 사람들은 ‘어느 외국도 진실로 우리 편이 되어 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했던 것 같다. 1870년대부터 1910년의 근세사 자료에서는 국가를 위한 원려는 없고, 망해가는 나라의 권력을 잡기 위한 치졸한 음모의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누구도 믿지 못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시해당한 왕비의 ‘폐서인 조서’에 날인을 강요하는 친일 내각과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내 손가락을 잘리는 한이 있어도 날인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저들은 자기들 멋대로 ‘폐서인’ 조서를 만들어 공포하였으나 세자가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며 반발하자 폐서인을 면하고 ‘빈’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고종의 의도된 핑계에 의해 국장이 몇 번이나 연기된 끝에 ‘황후 추존’ 직후인 1897년 11월 22일 아침 홍릉에 모셔졌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시신이 땅에 묻히는 데 2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니 지하에서 어찌 편히 잠들 수 있었겠는가.
일제의 간교한 계략과 미국·일본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아래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졌을 때 민영환 선생의 자결과 신규식 선생의 자결 기도는 조선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해 조선 민족의 의기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경술국치 때는 황현 선생의 자결이 민족의 충의를 흔들어 깨웠다.
당나라 때 역사가 유지기(劉知幾)는 ‘사관에게는 재능·학문·식견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선 성종과 연산 때 김일손의 직필이나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동호직필’ 고사와 제나라 태사 백·중·숙·계(伯仲叔季) 형제의 이야기도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고사다.
한국인 모두가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에 분노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대다수 젊은 지식인조차 ‘독도(獨島)’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기초 한자어조차 읽고 쓸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옛 자료를 찾아내고 해독하여 연구할 능력은 있는 것인가. 아직도 ‘경술국치’를 ‘한일합방’이라 가르치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황후’로 추존된 분을 ‘민비’라고 폄훼해 부르며, 소리 높여 민족과 애국을 외치는 이는 많지만 국치일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국가가 편하지 않은 이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치욕의 날을 맞으며 순국선열의 유지(遺志)와 국가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박광민 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 기사입력 2008.08.28 (목) 18:54, 최종수정 2008.08.28 (목)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