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이사람]‘조광조’펴낸 이상성 성균관대 교수
경향신문입력2007.02.09 16:29
"조광조의 죽음으로 개혁이 좌절되었으니 모두 실패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의 방향성이 잘못되었거나 그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었느냐의 여부를 논의해야 합니다."
이교수는 조선 성리학의 쌍벽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 것을 '실패'의 근거로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퇴계가 조광조의 '행장'을 지으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고 고백한 것이나 율곡이 파주에 은병정사를 짓고 조광조와 퇴계를 모신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는 "퇴계와 율곡의 삶을 보면 정신적으로 가장 존경했던 이가 바로 조광조"라면서 "후대의 선비들이 그를 선비정신의 표준으로 존경한 것은 그가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의 완급조절을 문제삼는 데 대해서도 반박했다. "개혁은 개혁해야 하는 시기를 놓치면 의미가 없다"면서 "조광조가 당면한 과제들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조광조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학문은 가벼워 보일 겁니다. 그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되는 학행일치(學行一致)를 실천했습니다. 남이 알아주느냐의 문제를 떠나 진리에 적합하느냐가 문제였어요."
특히 오늘날 '개혁' 문제에 관한 근본적 성찰과 방향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조광조의 '개혁'은 변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면서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근본이 지켜지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의 개혁은 지고의 정치, 즉 지치(至治)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 개인적인 욕심이나 정치적 편당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개혁을 개인의 이익이나 당략, 집권을 위해서 한 게 아니었어요."
개혁의 정당성이 있었고 가야할 길이 분명했으므로 '장고'(長考)를 하거나 머리를 굴리는 정치를 할 필요도 없었다는 설명이다.
"조광조는 개혁에서 본(本)과 말(末)이 뒤집혀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위정자들도 조광조의 실패만 보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가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다음 저술로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역주를 준비중인 이교수는 조광조 평전을 씀으로써 조광조 연구를 일단락지을 계획이다.
〈글 김진우·사진 권호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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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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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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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82년 음력 8월 10일 조선 경기도 용인현 |
사망 | 1519년 음력 12월 20일 조선 전라도 능성현 |
사인 | 사형(사약) |
국적 | 조선 |
별칭 | 호 정암(靜庵), 자 효직(孝直), 시호 문정(文正). |
학력 | 1515년 알성시 급제 |
직업 | 문신,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작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이씨 |
자녀 | 아들 조정, 아들 조용 |
부모 | 아버지 조원강, 어머니 여흥 민씨 |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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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 ||||||||||||||||||
수기치인(修己治人) 인(仁) · 의(義) · 예(禮) 충(忠) · 효(孝) | ||||||||||||||||||
인물 | ||||||||||||||||||
공자 · 칠십자 · 맹자 · 순자 · 동중서 · 소옹 · 주돈이 · 장재 · 정호 · 정이 · 주희 · 왕양명 | ||||||||||||||||||
경서 | ||||||||||||||||||
사서오경 · 십삼경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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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 ||||||||||||||||||
삼공 · 서원 · 국자감 · 과거 · 육예 · 사대부 · 한국의 유교 · 한·당 시대의 사상 · 송·명 시대의 사상 | ||||||||||||||||||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1] 김굉필, 유숭조의 문인.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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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유년기[편집]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