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만식
한국교회사 인물 탐구
1. 조만식 장로
조만식 장로는 1882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에서 조경섭씨의 독자로 태어났다. 1888년 6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고, 8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글을 익혔다.
1897년부터 상업에 종사하였다. 평양 종로에 포목전을 차려 포목상 주인이 되었다. 그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술을 마셨다. 향후 8년을 장사에 몰두하다가 1905년에 평양 숭실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숭실 중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세운 학교였다. 여기에서 복음을 받았고, 신앙이 들어가자 금주 금연을 단행하게 되었다. 조만식은 이 학교에서 3년간 수업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박애 정신과 애국 애족의 뜨거운 정신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정칙 영어 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습득하였고, 마친 후 명치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1914년 고국에 돌아왔으나 한일 합방이 체결되었고 나라는 일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미국 유학의 꿈을 꾸던 조만식은 유학을 포기하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 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다. 오산 학교는 민족주의 사상을 강조하여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힘을 기울이는 학교였다.
1915년 이승훈이 옥에 투옥되자 조만식이 오산학교의 교장에 올랐다. 33세의 청년 교장은 머리를 깎고 한복을 입고 자리에 섰다. 그는 혼자서 1인 4역을 감당하였다. 교장, 교사, 사감, 사환을 도맡아서 했다. 일반 과목뿐 아니라, 성경 과목까지 넣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독립 운동 가담자로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망명의 길도 있었지만 고통 당하는 민족의 한 사람으로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남아 있었다.
1921년 평양 YMCA 총무가 되었다. 그 무렵 평양 산정현 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1922년, 조산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국산품 애용을 위해 조직한 애국 조직이었다. 그는 교육 사업에 정열을 갖고 있어 평양 숭인 상업 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았으나, 6,10만세 사건으로 교단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27년 신간회를 결성하여 한민족의 대동 단결을 고취하였다. 그는 이 신간회의 중앙 위원 겸 평양 지회장을 맡아 뛰었다. 그러나 1931년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는 관서 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을 통한 민족 운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2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에 올라 언론을 통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신사 참배 강요에 거절하자 주기철 목사는 투옥되고, 산정현 교회는 일본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1945년 3월 조만식 장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반석리에 내려가 농사에 종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고 새 세상이 왔다.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여 최고 영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등장으로 공산당이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북조선 인민정치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위원장에 조만식 장로를 앉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과 반대되는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조선 민주당은 강한 세력으로 일어났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조만식 장로는 고려 호텔 2층에 감금 상태가 되었다. 조선 민주당 당원 중 열심있는 자들이 그를 구출하려 하였으나 본인이 거절하였다. 민족이 당하는 수난을 홀로 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금 상태에서도 신앙으로 그 곤욕을 이겨 나갔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을 때 미국의 브라운 소장이 조만식 장로를 만났다. 브라운 소장은 그에게 남하를 권하자 일천만 북한 동포를 버리고 혼자 남하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6,25동란이 터지고 나라가 혼란기에 이르렀을 때, 조만식 장로는 심장병과 복막염을 앓게 되었다. 그 병으로 인하여 어느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그 후의 소식은 누구도 잘 모른다.
조만식 장로는 신앙을 생활로 승화하여 일생을 곧게 산 민족의 등불이요, 고난의 시대에 민족과 함께 아파하고 민족을 위해 지도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이 땅이 낳은 위대한 거목이었다. 그는 교육가이고, 정치가이고,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다. 이론과 생활이 일치한 실천적 신앙가 조만식 장로는 이 땅에 영원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자아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