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양녕대군파, 경녕군파,후령군파

오르막내리막 2012. 12. 8. 12:27

 

양녕대군파(태종대왕1남)약사

녕대군은 태종대왕의 제1남으로 10남 15녀를 두었다.
장남 순성군(順城君)의 휘는 애(言豈), 시호는 희안(僖安)이다.

지중추(知中樞) 평산신씨 자경(自敬)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었으며, 참의(參議) 영일정씨 종성(宗誠)의 딸과 재혼하여 오천군(烏川君) 사종(嗣宗) · 헌양군(獻陽君) 사조(嗣祖) · 포산부정(苞山副正) 사원(嗣源) ·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 등 4남 4녀을 두었다.

오천군의 자는 희적(希籍), 호는 둔재(鈍齋)이다. 집의(執義) 전의이씨 소(紹)의 딸과 혼인하여
석릉수(石陵守) 철강(鐵崗) · 도양수(道壤守) 철숭(鐵崇) · 반월수(半月守) 철봉(鐵峯) · 임성수(任城守) 철곤(鐵崑) · 봉령군(鳳嶺君) 철암(鐵巖)의 5남 3녀를 두었다.
헌양군(獻陽君)은 판관(判官) 진주강씨 우(遇)의 딸과 혼인하여 반성수(班城守) 희인(希仁) · 극포군(極浦君) 희남(希男) · 완구정(完丘正) 소남(小男)의 3남을 두었다.

포산부정(苞山副正)은 진주류씨 혼(渾)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다.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은 홍주송씨 평(枰)의 딸과 혼인하여 진성수(珍城守) 면(綿) · 하원수(河源守) 찬(纘) · 추성수(秋城守) 서(緖)의 3남 4녀를 두었다.
차남 함양군(咸陽君)의 휘는 포(言布), 시호는 이안(夷安)이다.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 고 성이씨 대(臺)의 딸과 혼인하여 부원군(富原君) 진(鎭) · 호산군(湖山君) 현(鉉)의 2남을 낳았다. 또 제주양씨와의 사이에 봉양수(鳳陽守) 종남(終南) · 파징수(波澄守) 종암(終巖) · 관산수(管山守) 종석(終 石) · 화천군(和川君) 종근(終瑾)의 4남 등 6남을 두었다.
부원군의 시호는 양평(良平)이며 하음봉씨 극화(克和)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구산군(龜山君) 계남(繼男)을 두었다. 호산군의 시호는 소평(昭平)이며 보안부정(保安副正) 수남(壽男) · 진안부정(鎭安副正) 영남(永男) · 안음부수(安陰副守) 순정(順鼎) · 강음부수(江陰副守) 순손(順孫)의 4남을 두었다. 봉양수는 진주류씨 벽(闢)의 딸과 순흥안씨 눌(訥)의 딸과 혼인하여 육창부수(陸昌副守) 언박(彦博) · 영천부수(靈川副守) 언륜(彦倫) · 빈양정(濱陽正) 언수(彦修) · 비옥령(比屋令)·언광(彦光) · 무창령(茂昌令) 언신(彦伸)의 5남을 두었다. 파징수의 시호는 경신(敬信)이며, 파평윤씨 자선(孜善)의 딸과 혼인하여 빈양부수(濱陽副守) 세번(世蕃) · 무성부수(武城副守) 세영(世榮) · 청성부수(淸城副守) 세함(世王咸) · 금산부수(錦山副守) 세창(世昌)의 4남을 두었다. 관산수는 여산송씨 수장(壽長)의 딸과 혼인하여 고산부수(高山副守) 세인(世仁) · 임성부수(任城副守) 세의(世義)의 형제를 두었다.
화천군은 창녕조씨 징(澄)의 딸과 혼인하여 무림부수(茂林副守) 언성(彦誠) · 예천부수(醴川副守) 언형(彦亨) · 선성부수(宣城副守) 언수(彦修) · 의성부수(宜城副守) 언규(彦奎)의 4남을 두었다.
3남 서산군(瑞山君)의 휘는 혜이며, 안산군(安山君) 김개(金漑)의 딸과 혼인하여, 학림군(鶴林君) 이, 취성군(鷲城君) 경 2남을 두었다. 학림군은 안동권씨 준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조양부정(兆陽副正) 환(環)을 두고, 취성군은 성주이씨 철근(鐵根)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계림군(鷄林君) 탄(坦)을 두었다.

4남 고정부정(古丁副正)의 휘는 겸(謙)이며, 함평노씨 길창(吉昌)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구성수(駒城守) 정(靖)을 두었으며, 구성수는 경주이씨 순(恂)의 딸과 혼인하여 창녕부수(昌寧副守) 적(勣) · 금마부수(金馬副守) 면(勉) 등 2남 2녀를 두었다.
5남 장평도정(長平都正)의 휘는 흔(?)이며, 파평윤씨와 진주강씨 위(偉)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파평윤씨는 딸 둘을 두고, 진주강씨는 부림령(富林令) 순(順) · 우성령(牛城令) 석(碩)의 2남과 3녀를 두었다. 부림령의 시호는 정숙(靖肅)이며, 원주변씨 처관(處寬)의 딸과 혼인하여 수주정(樹州正) 윤인(允仁) · 유제도정(楡梯都正) 윤의(允義) · 덕풍부령(德豊副令) 윤례(允禮)의 3남을 두었다. 우성령은 안동권씨 종손(從孫)의 딸과 혼인하여 덕창부령(德昌副令) 자인(自仁) · 시천부령(矢川副令) 자의(自義) · 해평부령(海平副令) 자례(自禮) · 화성부령(化城副令) 자지(自智) · 가조부령(加祚副令) 자신(自信)의 5남을 두었다.
6남 계천도정(溪川都正)의 휘는 성(誠)이며 의령남씨 척(倜)의 딸과 혼인하여 1녀를 두었는데 고성박씨 욱(頊)에게 출가하였다.
7남 봉산부정(蓬山副正)의 휘는 순(諄)이다. 전주최씨 윤형(允衡)의 딸과 혼인하여 외딸을 두었는데 문화류씨 인유(仁濡)에게 출가하였다.
8남 안창정(安昌正)의 휘는 심(諶)이다. 진주강씨 처정(處貞)의 딸과 혼인하여 임회수(臨淮守) 수(樹) · 사천수(沙川守) 식(植) · 서천수(舒川守)의 3남을 두었다. 임회수는 강릉김씨 상간(尙侃)의 딸과 혼인하여 이아령(利阿令) 영손(永孫) · 한남령(漢南令) 경손(敬孫) · 풍양령(豊壤令) 효손(孝孫)의 3남을 두었는데 후사가 없다. 사천수는 진주류씨 의습(義濕)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용천부수(龍川副守) 지손(智孫)을 두었다.
9남 돌산부정(突山副正)의 휘는 광석(廣石)이다.
여흥민씨 담(憺)의 딸과 혼인하여 영덕수(盈德守) · 익안수(翼安守) 신손(信孫) · 금사수(金沙守) · 금주부수(錦州副守) · 가연부수(加淵副守) 인손(仁孫) · 장림령(長臨令) 진손(眞孫)의 6남을 두었다. 장림령만 후사가 있고 그 외는 무후이다. 장림령은 김해정씨 석강(石剛)의 딸과 혼인하여 옥계부령(玉溪副令) 숙손(淑孫) · 은계부령(銀溪副令) 숙령(淑齡) · 헌산부령(탧山副令) 숙근(淑根)의 3남을 두 었다.
10남 금지부정(金池副正)의 휘는 광근(廣根)이며 현풍곽씨 항(恒)의 딸과 혼인하여 외아들 광산수(光山守)와 1녀를 두었는데 딸은 창원공씨 승조(承祖)에게 출가하였다. 광산수의 후사는 기록이 없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인구수
지역별
인구수
서울시
4140
전라북도
6740
부산시
700
전라남도
7340
대구시
200
경상북도
1890
대전시
300
경상남도
6890
인천시
340
제주도
10
경기도
6390
일본
20
강원도
3360
미국
30
충청북도
2720
기타
150
충청남도
7450
합 계
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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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전주이씨대동종약원

 

  경녕군파(태종대왕 1남) 약사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양녕·효령대군과 같이 수학하고 세종대왕의 사부가 되었다.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여 국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필히 자문에 응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정윤이 되고 그 해 10월에 원윤으로 승차하여 종부시 제조가 되었으며, 1417년(태종 17) 9월에 정헌대부 경녕군으로 봉작되었다. 1419년(세종 1) 8월 중국 명나라와의 마찰이
있자 상왕 태종대왕의 정사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국교를 정상화시키는 동시에 파격적인 후대를 받았다. 특히 황제의 친필로 된 어제서(御製序)를 비롯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환국하였는데 상왕 태종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악재까지 나와 환영하고 연회를 베푼 일은 매우 유명하다. 이때 공의 나이 24세였다.
공은 그 후에도 세종대왕을 수시로 보필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국방의 대비책과 불교문화의 정화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는 조정을 대표하여 국교를 돈독히 하였다. 이런 공로로 1425년(세종 7) 11월 숭록대부로 승차하고 1430년(세종 12) 정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으로 승계되었다. 세종대왕은 승하할 때 “후일 경녕군 묘소는 왕릉에 못지 않게 예우를 갖추어
드리라.”고 했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 후 문종대왕·단종대왕 때에는 종부시 도제조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1458년(세조 4) 배위인
청풍김씨의 묘소가 있는 충주 숭선 땅으로 낙향하여 그 해 9월 9일 6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하고 `제간(齊簡)'으로 시호를 내리고 충북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언곡 계좌에 예장하였다.
1727년(영조 3) 9대손 도정 한겸(漢謙)으로 하여금 별립종손(別立宗孫)으로 봉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으로 추봉하고 승지 이승우를 묘소에 보내어 제악으로
치제(致祭)하였다.
어머니 효빈 김씨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3동 한다리 아차산 남록 자좌이다. 배위인 부부인
청풍김씨는 참의 김관(金灌)의 딸로 1416년(태종 16)에 혼인하여 군부인에 올라 1450년(세종 32) 4월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잔작동 축좌이다. 1872년(고종 9) 청원부부인으로 추봉되었으며, 1994년 충북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군부인 개성부 마씨의 묘소는
부군 묘소 백호등에 설단하였는데 이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화리 모양군 묘역으로 옮겼으며, 군부인 전주최씨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신남리 함봉산 손좌이다. 공은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4남 · 5남 · 6남은 후사가 없다. 장녀는 참봉 정석내(鄭石쨴)에게, 차녀는 현감 송계흥(宋繼興)에게 출가했다.
조선시대 경녕군의 후예로서 문과 급제자는 27인이고, 무과 급제자는 4인이다. 공의 증손 하동군 계출이 4인인데 좌랑(佐郞) 희온(希溫) · 전적(典籍) 희량(希良) · 찬성(贊成) 희득(希得) · 교리(校
理) 용호(容鎬)이다. 신당군 계출은 병조판서 희검(希儉) · 이조판서 수광(睟光) · 영의정 성구(聖求) · 이참(吏參) 민구(敏求) · 이참(吏參) 당규(堂揆) · 예조판서 현석(玄錫) · 사검대(舍檢大) 현기(玄紀) · 이조참의 현조(玄祚) · 이참(吏參) 희원(喜元) · 정언(正言) 한종(漢宗) · 좌승지(左承旨) 형하(瀅夏) · 승지(承旨) 유하(游夏) · 헌납(獻納) 유성(游誠) 등 12인이다. 파릉군 계출은 승지(承旨) 유신(惟
信)이고, 서원군 계출은 함남절도사(咸南節度使) 용순(用淳) · 도사(都事) 시민(時敏) · 지평(持平) 시우(時雨) · 선전관(宣傳官) 명(銘)이다. 함평도정 계출은 도승지 유인(裕仁) · 대사성(大司成) 홍인(弘仁)이고, 익흥군 계출은 대사헌 형욱(馨郁) · 정언 숙(핈) · 좌승지 서조(瑞朝)이다. 이상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고, 특히 지봉(芝峰) 일가는 3대를 정승으로 활약하고 그
후손들 13명이 대과에 급제하였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는 3대 정승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순국열사로는 일문칠절(一門七節)이 있다. 병자호란 때의 3충신으로 성구(聖求)의 아들 상규(尙揆)와 민구(敏求)의 두 아들 원규(元揆)와 중규(重揆)가 있다. 4열녀로 성구의 처 안동권씨, 상규의 처 능성구씨, 이일상의 처와 한오상의 처는 성구의 두 딸이다. 이들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함으로써 7절이 되었다. 이때 오성군의 현손 중명(重溟)과 그 둘째 아들 증() 부자도 함께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복성군의 5대손 환(丸)이 중봉(重峰) 조헌(趙憲)과 정읍 사현에서 역전하여 장열히 순사하니 임금은 그곳 이름을 `의분동(義墳洞)'이라 이름하였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정유재란
때에는 은천군의 6대손 시수(始秀)와 시화(始華)가 만정 임세무 김경덕·경탁상 등과 500여 명을
이끌고 호치(胡峙)에서 적과 분전하다가 순국하니 시신도 못찾아 치발장으로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 싸움에서 순국한 애국열사가 92인으로 유림에서는 고창군 흥덕면 남당에 모충사(慕忠祠)를
짓고 위패를 각각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그분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끝으로 곽(廓)은 가림군의 5대손으로 1615년(광해군 7) 무과에 장원하고, 1636년(인조 14) 회답사로 심양(瀋陽)에 갔다. 때마침 국호를 청(淸), 왕을 황제, 연호를 숭덕이라고 하고 들에서 제사지내려는 마당에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위협하였으나 결사항거 불참하고 본국에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승복하고 돌아왔다 하여 선천(宣川)에 귀향보냈다가 곽의 충절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후에 삼도통제사에까지 올라 충성을 다하였다. 이밖에도 종정(宗貞)·섬(暹)·원남(元男)·제송(齊松)·영식(永植)·용준(用濬) 용침(用沈)·시욱(時旭)·굉()·익용(翼龍)·경(璥)·희강(希剛)·형광(絅光)·사의(士義)·동규(同揆)·석규(碩揆)·하(廈)·홍적(弘勣)·종(悰) 경욱(慶郁)·광욱(光郁) 등은 경녕군의 후예로서 나라를 위해 일한 인물이다.
 

종원 분포 상황

파별
세대수
인구수
온천군파
1,622
7,852
오성군파
1,369
6,541
복성군파
2,620
10,798
모양군파
3,299
11,914
가림군파
1,054
4,959
단상도정파
2,799
14,968
합 계
12,763
5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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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령군파(태종대왕 7남) 약사

 

령군은 태종대왕의 7남으로 휘는 간(?)이다. 배위는 수안군부인(遂安郡夫人) 평산신씨와 동양군부인(東陽郡夫人) 한양조씨이다. 신씨는 딸 하나만 낳았고, 조씨가 2남 1녀를 낳았다.
후손들 중에는 문과급제 1명, 진사급제 9명, 무과 5명과 많은 음직(蔭職)을 배출했다.
대략 품계별로 보면 통덕랑이 12명, 통훈대부가 4명, 통정대부가 8명, 절충장군 3명 등이 있고,
관직으로 보면 승지 1명, 참의 3명, 부사(府使) 3명, 목사(牧使) 2명을 비롯하여 교리(敎理), 검상(檢詳), 지평(持平), 감찰(監察), 정(正), 도사(者事), 판결사(判決事), 주부, 참봉 등 다양하고, 대호군, 부호군, 호군, 부사과, 만호등 무관직도 여럿 있다.
비록 종원수가 적고 여러모로 종세(宗勢)가 약하지만, 현대 인물로는 우리나라 심리학계의 대두인 진숙(鎭淑) 교수와 국문학계의 저명한 교수로서 숙명여대 문과대학장을 역임한 을환(乙煥) 교수 등이 있으며 관계(官界)에서는 교통부 지역교통국장, 관광국장, 화물유통국장 등 요직을 거쳐 관리관으로 중앙해난심판원장을 역임한 후 초대 한국해양오영방제조합 이사장을 지낸 차환(且煥) 종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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