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조 만식

오르막내리막 2012. 11. 3. 17:36

전쟁은 백 가지 천 가지로 불리하다”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는 고당 조만식
2010년 11월 12일 (금) 03:31:18 박창수 landpa@hanmail.net

고당(古堂) 조만식(1883~?). 그는 한국 기독교가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고당은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여 거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비폭력 비타협 독립 운동 노선을 견지하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검소하고 실천적인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았다. 또 고당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애국 청년들을 배출했고, 일제하 민족 독립 운동의 단일 대표체였던 신간회의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서, 당시 해외 독립 운동보다 더 힘들었던 국내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고당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서, 한국 교회를 섬긴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후 고당은 이북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건국 준비에 전념하였다. <사상계> 1956년 6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이북엔 정치적 인물은 조만식 단 하나”였다. 당시 이북에서 고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다 그의 아래, 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지 감히 그와 의견을 나누고 바꾸고 정권을 다툴 사람이 없었다. 거기는 송진우도, 김구도, 장덕수도, 여운형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알고 있던 소련 군정은 고당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직을 제안하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당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 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적이었던 숱한 정치꾼들 때문에 우리 역사에 고난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고당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자신이 대통령 되는 것보다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우선시한 큰 정치인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시에 신탁통치안이 우리 민족의 자치를 배제하지 않았고 또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일단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후에 통일국가를 세우고 분단을 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타당하다. 그러나 일제하 36년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받다가 해방을 맞은 민족이 다시 열강에게 한시라도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고당과 같은 순수 민족주의자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당은 자신이 신탁통치를 계속 반대할 때 소련 군정으로부터 어떤 해를 당하게 될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당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고려호텔에 연금되고 말았다. 그가 숨을 거둔 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 기간인 1950년, 인민군이 평양에서 퇴각할 때 살해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20년, 고당이 중심이 되어 평양 야소교 서원에서 발표한 조선물산장려회 설립취지서에 의하면, 나라가 빈약한 “일대 근인(近因)”은 “자작(自作)자급(自給)치 아니함”이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조선 물산 장려, 곧 보호무역이었다. “현금 구미각국은 저토록 상공업이 발달되었음에도 자유무역주의를 행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고 모두 보호무역주의를 행하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선진이오 부강한 나라도 그처럼 국산을 장려하고 무역을 보호하거든 하물며 뒤떨어지고 빈약한 조선이리오.” 이와 같이 빈약한 후진국은 보호무역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방책을 써야 한다는 관점은, 오늘날 장하준,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비롯해서 세계 빈곤 문제를 고민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와 일맥상통할 만큼 중요한 통찰이었다.

고당은 농업을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역설했고, 동시에 상공업 증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 산업을 중시하였다. 고당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1932년 1월 <신동아>에 실린 설문 “세계 개조 사안”에서, 국가문제와 인종문제 등에 대한 “사회제도 개혁안”, 그리고 불경기 타개책에 대한 “경제제도 개혁안”에 대한 고당의 답변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매우 놀랍다.

“위선 특정계급을 배제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강폭한 민족을 억제하여 평등과 평화를 유지하겠습니다. 사유재산을 제한하여 일가족이 10만 원 이상의 치부를 금하고 총 산업기관을 민중화하겠습니다. 위선 세계적 불경기 타개책으로는 국제간 개인 간을 물론하고 일체의 공사채를 절대로 해방하겠고 일부 국가에 편재한 금을 약소국가에게 최저 이부로 대부하도록 명할 터입니다.”

고당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당시 자본주의의 계급 갈등 문제와 세계열강의 식민 지배 문제, 그리고 국가 간 개인 간 빈부 격차 문제를 비판적으로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특히 고당의 국가 간 개인 간 ‘공사 채무 탕감’(공사채 해방)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몇 년 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부담해야 했던 막대한 전쟁배상금 문제였기 때문이고, 오늘날 세계 빈곤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나라가 진 막대한 채무를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 세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약소국가에 대한 최저 이자 대부 제안도 오늘날 빈곤의 세계화 현실에서 매우 시급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고당은 1925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재산가들은 현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를 깨달아 고리대금에나 눈이 어두워 덤비지 말고 제 산업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라고 역설한 바 있었다. 이상과 같은 고리대 반대와 최저 이자 대부, 그리고 채무 탕감은 모두 구약 성경의 희년의 경제법에 포함된다. 곧 고당은 개인적, 국내적 차원을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희년 경제관을 피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32년 6월 <신동아>에 실린, 전쟁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설문에 대한 답변에서 고당은 “나는 전쟁을 반대합니다”라고 답변하며, 정당방위 이상의 전쟁을 부인하였다. “전쟁을 이(利)하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고당은 “전쟁은 백 가지 천 가지로 불리”하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전쟁을 폐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고당은 폐지할 수 있다고 답변하면서 그 방법으로 “(1) 군비 철폐를 단호히 실행할 것, (2) 부전조약(不戰條約)을 엄격히 준수케 할 것, (3) 국제중재재판 기관을 절대의 권위가 있게 할 것, (4) 국제연합군대를 설치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고당의 반전론(反戰論)은 기독교 평화 사상이 그 기저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방지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고당의 놀라운 안목과 식견을 잘 보여 준다. 전쟁은 사람과 만물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희년 제도는 사람과 만물의 생명을 살리는 제도임을 생각할 때, 고당의 반전론은 희년 정신과 그 맥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고, 민족독립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안 받은 대통령 자리도 거부하고 끝내 그 생명을 내 놓은 고당. 희년적인 경제관과 희년적인 반전론만큼이나 그의 생애도 희년 정신을 실천한 삶이었다. 고당은 희년의 사람이었다.

 

 

- 조 만식 장로님의 겸손 -

최진연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왜정시대에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으며 한국의 간디라 불렸던 조 만식 장로님의 겸손함은 유명합니다. 순교자 주 기철 목사님과 조 장로님의 인연은 매우 깊었습니다. 조 만식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을 지낼 때 주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으며, 주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조 만식 선생은 그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조 장로님이 교회를 가려는 시간에 급한 손님이 찾아와 한 10여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마치고 급히 갔으나 예배는 이미 설교를 할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 없는 조 장로님은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주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말고 갑자기, “조 장로님,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조 장로님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예배시간이라 하여도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 장로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가 호통 치는 대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꼬박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예배 한 시간이 조 장로님에게는 끔찍하게도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예배를 다 마칠 무렵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 예배를 마치기 전에 기도를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는 예배의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게 상례인데, 그렇게 예배 끝에 기도하게 함에는 목회자로서 주 목사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 요청에 조 장로님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이런 놀라운 기도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히 여겨 예배에 늦게 된 죄인입니다…. 또한 주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사오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흐흐흑….”

조 장로님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에 함께 예배드리던 모든 성도들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목사님의 권위가 얼마나 존중되었던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날 교회 분규가 더러 일어나는 요인이 목회자의 권위가 바로 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 권위는 목회자 자신에 의해서 실추되기도 하고 또 사단의 앞잡이가 된 장로 등 교인들에 의해 고의로 무시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당시 주 목사님이 보여준 권위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조 만식 장로님의 그 신앙인격의 겸손함을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일로 인해서 조 만식 장로님은 더욱 존경받는 스승이 되었으며, 당시 성도님들의 귀감이 되었음은 물론, 그 겸손한 신앙인격은 천추에 보석처럼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