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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가 안동김씨’뉴시스|입력2007.02.04 10:52


  • 안동김씨는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로 나뉜다. 요즘 안동김씨는 대부분 구안동김씨다. 신안동김씨보다 10배 가량 많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 구안동김씨 42만6000명, 신안동김씨는 4만8000명이었다.

    세도정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안동김씨는 신안동김씨다. 조선 정치의 최정점에 섰던 가문이다. 왕을 막후에서 조정하며 조선을 주물렀다. 신안동김씨의 가문사는 곧 조선의 정치사인 셈이다.



    안동김씨는 김번의 아들 생해 때부터 급부상했다.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의 사위가 되면서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이기 시작했다. 이후 김상헌 대에 이르러 세가 활짝 피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과 정면 대결할 것을 외치며 굴욕적인 국서를 찢고 청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른 김상헌이 척화론자들에게 더 없는 존경을 받은 덕이다.

    이어 창녕조씨 조한영, 남원윤씨 윤형각, 전주이씨 이중휘 가문 등 서울 일대의 서인 노론가 가문과 통혼하면서 영달을 이어간다.

    안동김씨의 위기는 1674년,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찾아왔다(2차 갑인예송)

    이때 왕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줬다. 영의정 김수흥은 서인이라는 이유로 유배 당한다. 현종 다음 숙종은 서인을 견제하고자 즉위 초반 남인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는 좌의정 수흥의 동생 수항이 영암으로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1680년, 남인 사이의 다툼으로 빚어진 경신환국 덕에 수흥·수항 형제는 정계로 복귀했다. 동생과 형이 번갈아 영의정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수항의 아들 창집도 영의정에 올라 명문가의 명맥을 잇는다.

    그러나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장하던 노론 4대신 김창집은 경종이 소론의 급진파 김일경이 올린 상소를 인정하자 귀양에 처해지는 신세가 된다. 여기에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이 보태지면서 사약을 받고 만다. 영조 즉위 후 신원 회복과 복작이 이뤄지긴 하지만, 안동김씨 가문의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김병기(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 지음, 236쪽, 9900원, 김영사.

    <관련사진 있음>

    신동립 기자 reap@newsis.com
  • 구안동: 김 숙승        신안동: 김 선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