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중반 서울 청운동 백운장 자택에서 찍은 동농 김가진 선생의 가족 사진. 가운데 양복을 입은 이가 환갑 무렵의 동농, 맨일 오른쪽 한복을 입은 이가 부인 이씨, 맨왼쪽이 셋째아들 의한이고, 이씨가 안고 있는 아기가 넷째아들 용한이다. 의한의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제공
김자동(80)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은 13일 ‘집안 어른들 얘기 좀 해달라’는 부탁에 “우리 집안은 그저 원칙에 따라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의 집안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가문을 찾기 힘들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1930년대 중반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에서 찍은 김의한-정정화 부부와 그 아들 자동의 아홉살 무렵 사진. 성엄 김의한 부부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동농가 함께 했다.
김 회장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낸 개화파 관료 동농 김가진(1846~1922)이다.
동농은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3·1운동을 만났고, 그 뒤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탓에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동농은 1919년 10월, 3남 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곧이어 동농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일제는 임시정부를 두고 “사회 하층민들이 만든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라고 선전했으나, 동농의 망명과 이강의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