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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전주이씨

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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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李隣[1]/李璘[2])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이며,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이다.

                                                           정중부(鄭仲夫, 1106년 ~ 1179년 10월 18일 (음력 9월 16일) [1])본관은 해주


                                                           정도전(鄭道傳, 1342년[2]~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본관은 봉화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본관은 나주



  • 완창대군(完昌大君) 이자흥(李子興), 이탑사불화(李塔思不花)
  • 조선 추존왕 환조대왕(桓祖大王) 이자춘(李子春)
  • 완원대군(完原大君) 이자선(李子宣)
  • 완천대군(完川大君) 이평(李平)
  • 완성대군(完城大君) 이종(李宗)


  • 완창대군파,완원대군파, 완천대군파, 완성대군파


    목차

     [숨기기

    이연계와 이원계[편집]

    그의 이복 형 이원계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1388년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조선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24]


    분적[편집]

    전주 이씨에서 갈라진 대흥 이씨영해 이씨가 있다.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전주 이씨 22세에서 분관한 대흥 이씨(大興 李氏)의 시조이다. 대흥군은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정3품)과 명나라 관직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대흥군은 태조 이성계와 재종간 임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조선 개국을 반대하였다. 영해 이씨 시조 이연동(李延東)은 신라(新羅)때 사도(司徒)를 지낸 완산 이씨(完山 李氏) 이입전(李立全)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우주골 바람소리-(35)전주이씨 맥(脈), 전주 ‘시중공파’

    2013년 03월 22일 [완주전주신문]

    ⓒ 완주군민신문
    이사하면서 족보 버리는 세상에 족보 얘기 진부하다 하겠지만 지금도 족보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씨족이 있으니 족보가 일반적으로 무시당할 책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전주마전에서 ‘전주이씨’를 제대로 알았는데 ‘서부신시가지개발’로 100여 대촌 전주이씨 ‘시중공파’ 집성촌이 사라지고, 오직 무덤과 재실만이 그 흔적을 짐작케 한다.

    여기 살던 ‘시중공파’가 전주이씨의 맥이다.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태조[성계]의 고조부[이안사]가 집안 여러 사람을 이끌고 삼척으로 갔을 때 전주에 그냥 남아 지켜온 집안이 곧 시중[이단신]공 파이다. ‘이단신’은 고려 초 가슴 조이며 살았다.

    이용부가 형이고, 용부 아들이 넷(준의, 의방, 린, 거)인데, 둘째 의방이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정략가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피살되자 그 형 준의도 죽었다.

    이 때 셋째 ‘린(璘)’은 덕이 있어 목숨을 간신히 부지해 그 7세손이 이성계이다. 넷째 ‘거’는 조위총 반란군의 편이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최균(전주인)이 갔는데 ‘거’가 성문을 열어 최균이 조위총 군에게 죽었다.

    이 행위는 형 이의방에 대한 배신으로 형과 적이 되었다. 바로 ‘거[평장사]’ 집안과 ‘이판공파’가 합보를 했는데, 근래 ‘시중공파 대동보’를 하자는 제의가 왔다. 깊이 생각하자는 측이 한재공 자손들이었다. 합보도 좋지만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므로 ‘왜 그랬을까?’ 이 대목을 알고 결정하자는 의견 지당하다.

    옛날 『이판공파(승길)+대제학공파(자을)+예판공파(거)』 3파의 합보와 《황강공[이문정]세보》가 하나 되는 데는 선조가 안했던 일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왕가 《선원보》에 이준의, 이의방 형제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실이 역사관이요, 한국 정신이다. 족보를 버리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족보에 함부로 손대는 허장성세나 어설프게 아는 인사가 더 큰 문제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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