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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金壽童) 1457(세조3)∼1512(중종7)--(익)
< 차 례 > |
1. 만보당 소개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미수(眉?),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적(?)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 묘소 및 신도비 (2004. 10. 10. 항용(제) 제공)
<묘역 원경>
<묘소 근경>
<묘비>
<묘비 탁본 - 2004. 10. 10. 안사연 일동 참배 기념 제작. 대종회 서고 보관중>
안동김씨 시조, 분파, 인물 소개, 항렬표, 족보 발행년도, 시제일, 제례법 안내.
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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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金壽童, 1457년 ~ 1512년)은 조선의 문신으로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본관은 (구)안동(安東)이다.
147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어서 147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를 하여 예문관주서, 홍문관정자, 의정부사인, 사헌부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오르고 이어 홍문관전한과 홍문관의 직제학과 부제학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를 지내고 좌승지에 오른 뒤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 병조참판, 대사헌, 경기관찰사, 형조판서, 지춘추관사, 영중추부사, 영돈녕부사를 거쳐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되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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