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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광평대군파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다

뉴스와이어 | 입력 2009.10.29 11:29

(서울=뉴스와이어) 조선 인조 때 공신(功臣)으로,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오늘날의 서울 시장)·형조판서·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효종때 우의정에 재임하면서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유재란 등 국가 위기 시에 구국에 앞장섰던 완남부원군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의 묘역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될 전망이다.

이후원은 광평대군 이여(李璵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5번째 아들)의 7세손으로, 조선중기 예학의 대가였던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이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정묘호란 때는 총융사(摠戎使, 조선시대 총융청의 수장, 종2품 무관직)로 포로를 다수 포획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척사파(斥邪派)로 청(淸)에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고, 효종이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는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원은 스스로도 학문이 높았지만 1657년(효종 8) 우의정이 된 뒤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로 후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 성장한 송시열(宋時烈 : 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을 발굴, 중앙 정계에서 중용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재 양성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지방관으로 나아가서는 청렴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도덕정치를 지향,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사후 1668년(현종 9)에는 그의 공을 기려 나라에서 충정(忠貞)이라는 시호(諡號:왕이나 재상, 저명한 학자 등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나라에서 내려주는 이름)가 내려졌고, 1685년(숙종 11)에 광주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이후원의 묘역은 강남구 자곡동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 약 70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 광수산(光秀山) 앞 언덕 너머, 대모산 동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역은 1660년 조성된 초장지(初葬地 : 처음 매장한 곳) 금천(衿川) 삼석산(三石山)에서 광주(廣州) 세곡(細谷)을 거쳐 1714년 현 위치에 조성된 묘역으로서, 이후원과 그의 초취인 광주김씨, 재취인 영월 신씨가 함께 묻혀 있는 단분(單墳)과 묘표 2기, 상석(床石)·주준석(酒樽石)·향로석(香爐石)·해치석·망주석(望柱石)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대부 묘역들과 비교할 때 이 묘역은 봉분 주변으로 호석(護石: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을 두르고 해치상이 배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묘역의 동남쪽 발치에 세워진 묘표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비문과 추기(追記)를 짓고, 당대의 명필인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전서(篆書)를 잘 쓰기로 이름났던 당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이 '우재상국이충정공묘표(迂齋相國李忠貞公墓表)'라고 쓰여 있는 두전(頭篆:전서로 쓴 묘표의 이름)을 쓰는 등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서울시는 조선시대 묘역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 묘역 일대가개발과정에서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 이후원의 묘역 > 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하고자 한다. 2009년 10월 29일부터 30일 동안 지정계획을 예고하여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최종 지정 고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의견이 있는 경우 서울시 문화재과(02-2171-2594)로 제출하면 된다.

출처:서울특별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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