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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경영학이란

경영학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2011년 06월 22일 (수) 21:28:58 지면보기 15면중부매일 jb@jbnews.com
  

좀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대학의 모 교수가 매학기 마다 출제하는 시험문제는 언제나 동일하였다. 즉 "경영학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늘 여기에 맞추어 시험 준비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이번 학기에 그 교수가 칠판에 제시한 시험문제의 첫 글자는 '도'자였다. 알고 보니 "도대체 경영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닌가. 결국 같은 문제인데 '도대체'만 추가된 셈이다.

생각컨대, 이러한 출제 의도는 비록 같은 주제라 하더라도,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잘 숙지하고 체계화시켜, 나름대로의 관점이 정립 되었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이 같은 일화는 '경영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경영학은 학자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무릇 인간의 경제적 활동은 가계, 정부, 기업과 같은 개별경제에 의해 이루어고 있다.

경영학은 이러한 개별경제 특히 '기업경영에 대한 기본적 원리와 원칙을 도출하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확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과학적 이론을 구축함으로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학문'이라 정의해 볼 수 있다. 고로 경영학은 이론적이면서도 실천적(실용적)인 학문인 것이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우선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환자의 증상을 정확히 알아낸 다음, 이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마련해 질병을 고치는 일과 일맥상통하는 원리인 것이다.

오늘 날의 기업환경은 매우 빠르고 복잡하며 경쟁이 극심하다. 따라서 기업경영에 대한 과학적 원리와 원칙을 도출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경영학이 경영상 부딪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이나 기법을 완벽하게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에 관한 최적(最適)의 의사결정으로, 기본적 대응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영자들은 경영에 대한 기본개념과 원리를 잘 숙지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하긴 경영학을 배우지 않아도 기업과 같은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고(故) 이병철 씨나 정주영 씨 같은 분은 경영학을 배우지 않고도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 날과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는 경영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면 할수록 보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영이라 하면 으레 '기업경영'을 떠 올린다. 하지만 경영학은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행정기관, 종교기관 등과 같은 다른 조직에도 이를 적용하고 있다. 이는 조직을 내실화하고, 조직내외의 참여자들에게 조직을 능률적·효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위해서 이다.

모름지기, 경영은 보편적인 사회적 활동으로, 인적 ·물적·기타 자원을 합리적으로 결합하여 조직의 목표를 효과적·능률적으로 달성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특히 이러한 경영활동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영학의 학습으로 경영마인드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합리적 대안에 의한 의사결정, 유연한 사고의 전략적 행동, 경제적 효율성의 제고 등이 바로 경영마인드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는 기업의 생존과 성장·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로 본다.

요컨대, 경영학은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학문이다. 이를 통해 개인생활에서부터 조직생활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경영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기본적 개념과 원리만 습득해도 개인생활은 물론 조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반도체 천재 고 강대원 박사는 누구

[명예의 전당 헌액 고 강대원 박사-하]내가 기억하는 강대원

머니투데이 오동희 기자 |입력 : 2009.05.01 10:30|조회 : 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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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대원 박사(왼쪽)와 그의 부인인 강영희씨.

에디슨과 노벨 등이 이름을 올린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다음달 2일 헌액되는 고 강대원 박사는 어떤 인물일까?

국내에서는 그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931년 5월4일생으로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올해 78세다. 그는 보성고 교장, 진주중, 진주고, 부산사범대 학장을 지낸 강정용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고등학교 포함)를 월반한 데 이어 서울대 물리학과에서도 조기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을 떠나 36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별세해 가까운 지인이 많지 않다. 심지어 그가 30년간 근무했던 알카텔-루슨트(벨연구소)의 사장을 맡은 김종훈 박사도 그에 대한 기자의 질의에 프로필 정도만 보내왔다.

강 박사는 한국 전쟁 중에 해병대 통역장교로 복무한 후 1955년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공부하다가 도미해 1년만인 1956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이학석사(M.Sc)를 받았다. 그리고 3년만인 1959년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에 당시 세계 최고의 연구소인 벨연구소에 입사했다. 서울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지 4년만의 일이다.

작은 기억의 단편으로나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로는 강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며 반도체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김충기 KAIST 특훈교수, 강기동 박사(전 한국반도체 설립자), 한국인 최초로 미국 4년제 대학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UC머시드의 강성모 총장 등이 그들이다.

김충기 교수는 "1960년대 후반 미국 페어차일드반도체에서 현재 디지털카메라에 쓰이는 고체촬상소자(CCD)를 연구할 당시 벨연구소에 간혹 들렀는데 그때 강대원 박사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며 "그는 반도체 학계에서는 전세계적인 명망을 얻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에 입국할 때 그를 만났었다는 김 교수는 한국 반도체사에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강기동 박사와 함께 강대원 박사의 이름이 꼭 기억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충기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인 KAIST 교수들에게 전자공학과 학생들을 처음 가르치는 개강 수업에 모스펫을 개발한 강대원 박사에 대해 꼭 소개하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김충기 교수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장관이나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 담당 사장, 임형규 삼성전자 신사업팀 사장, 오춘식 전 하이닉스 부사장, 경종민 KAIST 교수 등 반도체 업계의 내로라하는 베테랑들을 길러낸 한국 반도체 학계의 대부다.

2007년부터 UC머디스 총장을 맡고 있는 강성모 총장은 1977년 1985년까지 벨랩에서 일하면서 강대원 박사와 인연을 맺었다.

강 총장은 "77년 벨연구소에 들어갈 때에는 CMOS가 등장해 한창 관심을 끌고 있을 때다. 당시 벨연구소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강대원 박사가 있었다. 그 분은 MOS 트랜지스터라는 큰 발명을 해 매우 유명한 분으로 '두원 캉'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민족과학네트워크와의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혔다.

강 총장은 강 박사와 함께 트랜지스터 만드는 일을 했고, 4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인텔이 먼저 만들었지만 32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CMOS 기술로 개발한 것은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강 총장은 기자와의 이메일을 통해 이같은 기억을 회고하고, 강 박사의 업적에 대한 간단한 소개자료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반도체(삼성전자 (1,418,000원 보합0 0.0%) 반도체의 전신)를 설립한 강기동 박사는 강대원 박사와 같이 경기고, 서울대, 오하이오주립대를 거친 3년 후배로 강기동 박사가 대학졸업 후 미국에서 진로를 결정할 때 벨랩에 먼저 가 있던 강대원 박사가 그의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강기동 박사는 "내가 처음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끝낸 후 모토로라연구소에 갈려고 하자 강대원 박사가 IBM왓튼 연구소로 가라고 했다"며 "벨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는 IBM연구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라고 했으나, 나는 생산현장에서 만드는 것을 좋아해 당시 반도체로 미국 내에서 제일 유명했던 모토로라의 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회고했다.

국내에 처음 초고속 인터넷(ADSL) 기술을 도입하고, 주전산기 개발에 참여했던 김건중 박사(현 전자정보인협회 회장, 전 한국정보통신 사장)는 "그는 술은 약했지만 담배를 좋아하는 끽연가였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그는 1992년 5월경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뉴저지 인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대동맥류 파열로 뉴저지 뉴브룬스윅에 있는 성베드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수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날이 1992년 5월 13일이다. 고 강대원 박사는 부인 강영희씨와 다섯명의 자녀가 있으며, 자녀 중 셋째딸인 릴리 강은 미국 내 세법 전문가로 현재 미국 시애틀 대학의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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