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제학 - 쓰지 신이치 실용-경제/경영 / 책 읽기
2010/09/0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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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어느정도 행복한가에 대한 느낌은 자신만이 정확히 느낄 수 있다.
반면 우리 사회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행복해 질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복해지기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GNH(국민총행복)이란 말은 부탄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라는 전 국왕이 만들어낸 말이다.
GNP나 GDP에 빗댄 말로 그는 GNP보다 GNH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발전이라는 프로세스 속에서 그 진행정도는 '풍요로운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GNP이고 이것에 크기에 따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게 된다.
결국 행복에 대한 척도는 부유한 정도에 따라 판단하고, 당연히 부유한 선진국 국민이 가난한 후진국 국민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도 많은 부분에서 불행하다고 느끼고, 자살율도 가난한 나라보다 높고, 가난한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쌓여 있다.
실제로 부탄에 있는 마을을 방문해보니 아직도 풍부한 생태계와 자급자족형 농업, 각종 공동체를 통한 상부상조, 슬로라이프가 건재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행복도가 상당히 높아 보였다.
같은 나라안에서도 오히려 도심지 쪽이 문제가 많고 살기 힘들어 보였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제나 이면에는 돈 문제가 있었다.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돈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풍요의 척도' 가운데 한가지일 뿐이다.
물질이나 기술만으로 풍요를 측정할 수는 없고, 더욱이 그러한 물질적 풍요에 의해 인간의 행복이 정해질 리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부탄의 각지에서 몇번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와 똑같은 마인드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란 불가능하다." - 아인슈타인-
'풍요'라는 마인드로 발생된 문제들은 풍요라는 마인드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풍요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우리들은 거기서부터 헤쳐나와 자유롭게 되었을때 다시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풍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을 진행시키고 GNP를 끌어올리는 원동력은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기업은 상품을 팔기 위해 광고나 매스컴의 힘을 빌리고 심지어는 교육마저도 이용하면서 소비자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GNP를 높이기 위해 각국 정부는 기업이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을 오히려 도와주고 있으며, 욕망은 날이 갈수록 그 부피를 늘려가고 있다. 결국 사회는 더욱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 질 것이다.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또 하나의 새로운 결핍이 생겨난다.
일본인들의 근면성, 집단지향성, 겸손, 순종, 인내심과 같은 성격들을 마치 문화적인 특성인 양 그려낸 '일본인론'이 한때 유행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일본의 '생산머신' 시스템을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월프런은 말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일본인다운 것들의 실상은 대부분 생산머신이 교육이나 매스컴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위해 봉사하는 순종적인 샐러리맨들을 만들어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 카렐 반 월프런, 부자나라 가난한 국민, 일본 -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간은 물론 시간을 120퍼센트 활용하지 않는 것은 죄악과도 같다.
'틈새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다. 스케줄러의 일정표가 꽈 메워져 있지 않으면 일정표의 빈 틈새를 통해 마치 찬바람이 새어나기라도 하듯 불안해서 어쩔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일정을 만들어 그 틈새를 채워려고 하며, 그것이 계획대로 안되는 경우 매우 괴로워 한다. 즉, 스케쥴이 꽉찬 일정을 가진 바빠보이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 하는 병인 것이다.
<정상형사회- 새로운 '풍요'에 대한 구상> - 히로이 요시노리
18세기 이래 경제시스템을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1단계는 근대사회의 성립기로 시장경제 시스템이 모양새를 갖추는 단계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 인간의 경제활동은 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협동을 통해 자연환경을이라는 테두리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이때는 소비할 수 있는 자원이 유한하므로 자연스럽게 검소의 미덕이 있었고 사리사욕이 부정적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욕심을 내어 자신의 몫을 늘리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허물어지면서 근대사회가 탄생된다. 공동체에서 독립한 개개인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사리사욕'의 긍정이 올바른 규범이 된다. 즉 사리사욕의 긍정만이 사회적인 부를 확대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긴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 1단계의 이론적 뼈대를 부여한 것이 아담스미스에서 J.S.밀에 이르는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이다.
제2단계는 18세기 후반의 산업화, 공업화 시대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철도, 건설 등 자연환경에 제약이 가하기 시작하고, 시장경제는 특정지역의 자연환경에 국한되었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 시대에 발생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인간의 주관적 영역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전까지의 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필요(Needs)에 있었지만, 이제 보다 주관적인 의미의 수요(demands)로 관심이 이동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상품의 가격에 대해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노동이나 토지 등 시장외의 요소를 기준으로 가격결정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고전학파는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 결정된다며 시장의 내부요소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3단계는 상품을 만들기만 하면 바로 팔리는 물건 부족의 상황이 끝난 20세기 중반이후를 말한다.
이시대의 대표적인 것이 케이즈 경제학이다. 소비사회로 분리는 이 시기에는 디자인등의 수단을 통해 차별화된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이 경제의 결정적 요소로 등장한다. 즉 제 2단계의 수요에 비해 더 주관적인 의미를 가지는 '욕구'마저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의식이 부각된다. 이 3단계에 이르러 시장은 자연적 제약이나 물질적 기반에서 풀려나와 고유의 자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시장결제를 무한히 확대, 성장할 수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미국 소매점 연합회 회장이 "우리들의 일은 여성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에 불만을 품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백화점이나 쇼핑몰에는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보다 더 예쁘고 좋은 물건'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 물건을 본 소비자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유행이 지난 것 같고, 새로산 브라우스에 안 어울리는 거 같고...
필요가 아닌 불만과 유행에 따라 소비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소비사회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의 무한한 성장을 약속해야 할 사회가 사실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불만위에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행복'을 말의 코끝에 매달아 놓은 당근처럼 언제나 손끝보다 조금 앞에 놓여 있다. 손안에 넣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그리하여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결국 우리는 '소비하지 않을 자유'마저 빼앗기고 있으며, 경제성장에서 표방하고 있는 부와 자유의 이면에 숨겨진 강제와 폭력을 깨닫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탈물질주의로 전환을 보여주는 세계의 여러 움직임이 있다.
환경운동의 전파, 녹색당, 아웃도어 활동, 가족농원, 수공예 등에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가 이에 속한다.
거기에 덧붙여 슬로 라이프, 슬로 푸드, 로하스(LOHAS,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도 있다.
이들 운동의 근본은 '이러면 안된다'는 금욕주의나 '이렇게 해야된다'는 정의감이 아니라,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쾌적한 삶이며 오히려 생활의 만족도와 충실도를 높인다는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과도한 물질적 소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탈물질주의의 의도인 것이다.
나는 결코 가지고자 하는 욕망의 자유와 소비하는 자유가 없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지고 싶은 물건 목록'뿐만 아니라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물건 목록'을 만들어 보길 권할 뿐이다.
그리함으로써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더 좋은 곳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며 행복이다. 그런 소중한 관계를 위해 우리는 시간을 듬뿍 쏟는 작업이 필요하다.
낙낙히 쉬는 시간, 즐겁고 유쾌한 시간, 포근하고 편안한 시간, 창조적인 시간, 몰입하는 시간, 멍하게 있는 시간, 맘 놓고 자는 시간, 무위의 시간, 설레는 시간....
생산성, 효율성, 소득, 경제성장, 경쟁, 돈, 속도, 계획, 목표 이라든가 하는 말과는 무관한 '시간의 소비'를 우리 삶 속에 늘려 가는 것. 돈 부자가 아니라 신간부자. 그것이 바로 슬로 라이프가 말하는 '풍요'요 '행복'인 것이다..
아래는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 중에 아주 잘 정리된 글이라 퍼올려 놓는다..
예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더 정신 없고, 더 분주하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삶의 질은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돈 버는 일에 올인해 부자가 된 사람에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돈을 버는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경제적 풍요가 삶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였지요.
돈을 얻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고,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친구를 잃으면서 얻은 결과입니다.
별 의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엉뚱한 목표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것이다.
우리들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이고 성장이다.
경제만 잘 된다면 만사형통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도 국가도 경제문제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경제만 풀리면 행복해지고,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는 부유하지만 불행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부자가 되고 보니 별로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 부탄이 그런 나라다. 부탄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풍부한 생태계, 자급 자족형 농업, 공동체를 통한 상부상조, 슬로라이프 등이 건재하고 있다.
사람들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책이 아니다. 풍요라는 이름의 괴물을 퇴치해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1958년에 비해 1991년은 GDP측면에서 무려 6배 성장했다. 하지만 만족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같은 결과다.
1984년 설문조사를 보면 조사자 중 만족한다가 13.7%, 그럭저럭 만족한다가 50.5%였다. 2005년에는 만족한다 3.6%,
그럭저럭 만족한다가 35.8이다. 2006년 세계 8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조사에서 일본은 178개국 중 90위였다.
우리는 103위다. 경제측면에서는 10위를 오르내리는 우리가 만족도 측면에선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당연하다.
개발이나 발전을 나타내는 지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채에 의해 삼림이 사라질 때마다 GNP는 상승한다.
마음 병으로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 받을 때마다 역시 GNP는 증가한다. 부를 측정하는 GNP 라는 척도 속에는 사회에 해가 되는 것,
자연에 해가 되는 것, 사람의 불행마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뭉쳐져 있다. 교통사고가 날수록 전쟁이 많이 일어날수록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총생산이 는다는 것과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다.
풍요가 행복을 준다는 착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가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풍요한 것이 문제다.” 간디의 말이다. 세계 인구 1%가 전체 부의 40%를, 2%가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빈곤층의 절반은 전세계 총생산량의 1%만 갖고 있을 뿐이다. “빈곤을 낳는 것은 자연을 자원으로,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계관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방패로 자연을 언제나 충분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이를 보완하고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을 동원해 온갖 기술을 낳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술은 환경과 생태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한층 심각한 빈곤을 안겨주었다.”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말이다. 실제가 그렇다. 바다는 수 백 년간 어민들에게 충분한 양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 (거대한 그물을 가진 하이테크 트롤선)이 나타나 해저를 뿌리 채 헤집고 해양의 생명 사이클을 파괴한 결과
지금 전 세계 어업의 90%가 붕괴직전이다. 빈곤으로부터 구해줄 줄 알았던 기술이 어민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은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일본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부자나라 가난한 국민, 일본>의 저자 카렐 월프런은 “일본은 풀이 죽고 기운이 없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가 제기한 의문점이다.
-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가 너무 많다.
- 우울하고 심심해 보이며 멍한 표정의 대학생이 너무 많다.
- 여성들이 가장 늦게 결혼한다.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으려 한다.
- 냉랭하고 공허한 관계의 신혼부부가 많다.
- 성도착적이며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의 만화가 너무 많다
- 샐러리맨들은 만원 전철 속에서 긴 시간을 시달리는데 잘 받아들인다.
- 다른 나라에서는 화를 내는 일을 일본인들은 당연히 받아들인다¡|
- 의문이 없다 등등
한 마디로 일본은 행복을 희생하여 부를 쌓았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 추구인데 행복하지 않은 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간이다. 다음은 장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는 것,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면 노후에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 근무시간에 맞는 수입 등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미래의 자유로운 시간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격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궁핍과 빈곤은 다르다. 저축이 있는가와 없는가의 차이다. 생활이 궁핍해도 행복한 사람은 많다. 저축이 있기 때문이다.
저축이란 은행의 저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 친척, 지인들과
가까운 지역이나 직장 속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고 자연계와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 등이다.
넓은 의미의 사회 안전망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저축이 없는 사람, 즉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빈곤은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풍요 역시 단순히 돈이 있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돈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거꾸로 악착같이 버둥대며 살아간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일수록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현대인은 정말 바쁘게 산다. 가장 많이 쓰는 인사말도 “바쁘시죠?”다. 바쁘지 않은 것은 무능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걸까? 그래서 얻는 것이 뭘까? 처자식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고 주장하지만
너무 바쁘기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그 동안 우리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면서 살아왔다.
돈을 벌기 위해 소중한 것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바쁘면 관계가 무너진다. 어떤 관계에도 수고와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관계에 들일 힘과 여유를 잃으면 행복도 잃는다.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의 대부분은 좋은 관계에서 생겨난다.
소설 어린왕자에 이런 장면이 있다. 친구인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장미꽃에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이토록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하지만 넌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렴.”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빨리 걸었다. 우리야말로 영혼이 쫓아올 수 있게끔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삶에서 사랑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사랑의 근본은 상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잊고 산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살아야 한다.
슬로라이프란 사랑하기 위한 시간을 되찾자는 운동이다. 슬로라이프는 돈이나 물건 대신 충분한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쟁의 틀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게을러져야 한다. 원래 사회는 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하는 장소가 아니다.
경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모든 것에 경쟁의 원리가 침투한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부자다
위만 보는 대신 아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장 대신 후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홋카이도에는 정신지체자 공동체인 베델의 집이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재미있다.
열심히 하지 않기, 중간에 그만둘 줄 아는 미덕,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 편견과 차별 대환영, 안심하고 절망할 수 있는 인생 등등.
한 마디로 우리의 통념과 반대다. 작업장에서는 <약점을 유대 기반으로 서로 도우며 안심하고 농땡이 칠 수 있는 직장 만들기>를
추구한 결과 몇 가지 히트상품을 가진 슬로비즈니스를 낳았다. 이들은 너무 즐겁게 일하며 대화에 참여한다.
아무리 보아도 장애를 가진 불행한 사람 모습은 아니다. 이곳의 창시자 무카이야치 이쿠요시의 말이다.
“예전에는 부유한 사람들은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병은 주로 가난과 힘듬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식은 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부자,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목표로 경쟁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델의 집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병 덕분에 상승지향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희들은 하강지향의 프로들입니다.” 상승하는 인생에서 하강하는 인생으로라는 말은 베델의 집의 이념이다.
우리는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문화에 익숙해왔다.
그래서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풍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교경제학을 추구하는 슈마허는
“경제학이란 보다 적은 소비로 보다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버마에서의 경험으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이다. “2-3주가 흐르고, 몇 군데 지역을 방문한 뒤 버마인들이 나 같은 구미 경제학자에게 조언 받을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배워야 했다. 버마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종교와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완벽한 경제제도를 갖고 있었다.”
경제학과 불교가 무슨 관계냐는 말에 그는 “불교 없는 경제학은 사랑 없는 섹스와 같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말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그 크기와 속도, 힘에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에 비해 기술은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경제는 수요창출에서 시작된다.
그 동안 불필요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 수요는 광고나 매스컴에 의해 없어도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별로 행복하지도 않다.
네트워킹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임 저 모임 모임이라는 모임은 다 쫓아다닌다. 점심은 두 탕, 저녁은 세 탕을 겹치기로 출연하기도 한다.
주말에는 결혼식이다 뭐다 해서 정신 없이 다닌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의구심이 생긴다.
정치를 하려는 것도 아닌데 뭐 저렇게까지 분주하게 살까? 저래서 얻어지는 게 뭘까? 과연 행복할까?
그 사람이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끌려 다닌다는 생각마저 든다. 돈과 시간의 문제도 그런 것 같다.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도 그렇다. 나는 행복이 다른 것보다 우선순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풍요도 행복관 관계가 높을 때 의미가 있다.
다음 사례가 그 얘길 해 준다. 노인과 청년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노인이 얘기한다.
“힘도 좋은 청년이 일은 하지 않고 왜 그리 빈둥대고만 있나!” 청년이 답한다. “일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노인이 말한다.
“일을 하면 돈을 받지 않는가!” 청년이 대답한다. “돈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노인의 말이다. “부자가 되지” 청년이 말한다.
“부자가 되면 뭐가 좋은데요?” 노인의 말이다. “부자가 되면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지” 마지막으로 청년이 말한다. “저는 이미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성경 말씀이다. 풍요를 얻기 위해 영혼을 지불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헨리 데이빗 소로는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간소, 자립, 관대, 신뢰”라는 네 단어로 답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 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풍요를 얻기 위해 세 가지를 희생했다. 땅, 영혼, 사회가 그것이다.
soil, soul, society. 해결방법은 역순이다. 지구와 이어지는 것, 자신과 이어지는 것, 사람들과 이어지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 뭔지, 지금 자신은 어떤 위치인지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출처] 행복의 경제학 - 쓰지 신이치 |작성자 3점스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