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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김씨 돌림자

안렴사공 김 사렴

김사렴(金士廉). (생몰년 미상)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1405년(조선 태종 5년) 추정

< 차         례 >

 1. 안렴사공 및 연보 소개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3. 송천서원 소개

 4. 각종 문헌 자료 소개     5. 안렴사공 배향 서원  6. 스승 및 말년의 교유

 7. 신도비 건립   8. 묘소 발견과 영모재  9. 유언과 묘소 발견 자료

 10. 기록문 찾기   11. 묘갈명   12. 시장소개   13. 각종 문헌 자료  

 

 

 

1. 안렴사공(휘 士廉) 및 연보 소개

 고려의 충신. 명장 방경(方慶)의 현손(玄孫). 문장에 능하며 공민왕 초엽 문과(文科)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 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5일이다.

 *저서-<孤忠誌> / 김사렴 저. 金在晩 編譯. 1982.

 <안렴사공 연보)(2003. 8. 12. 주회(안) 제공)

○ 1335-1405 <1708 송천서원 건립시 문헌자료, 양촌집 '1403 회목과 회약' 참조>,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 국대부인 현풍곽씨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 1358년(공민왕7)에 비서감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 1377년에 朝議郞 佐司諫 知制誥를 지내고, 당시(1382년) 4자 도절제사 김제, 척약재 김구용의 1자 서령 金明善이 동방급제하였다. <1377 고려 진사방목, 1382 고려 문과방목>

○ 벼슬이 문하시랑 정당문학 안렴사에 이르렀다. <1534 모재 김안국찬 (5대손)김지 묘갈명>

○ 안동인. 상락공 방경의 후. 어려서부터 學問에 뜻을 두었고 文詞에 富하여 공민왕 초에 登第하여 官은 안렴사를 지냈다.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直諫으로 善俱하여 著名하였다. 태조 개국시 청주로 逃隱(도은)하였고, 左司諫으로 누차 불렀으나 起遂(기수)하지 아니하고 入山하여 閉戶하고 終하였다. <1592이전 편찬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신현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는데, 여말에 김사렴을 비롯해서 많은 충신 열사들이 배출되었던 것도 이분의 높은 가르침에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1860 화해사전>

○ 공은 외모에서 풍채와 위엄이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마음 씀씀이가 크고 넓었으며, 공직에 나아가서는 오직 충절로 신명을 다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아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쳤다. (風采嚴威 器度弘傅 奉公以誠 按民盡力 名重當世) <조선명신록, 해동인물지)

○ 또한 공은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마음심)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마음심)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
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공(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가니 그 아우 석루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하면서, 운곡 원천석에게 역동 우탁 가문과 불훤재 신현 가문이 화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 1860 화해사전>

○ 배위 죽계부인 순흥안씨(父안원숭, 祖안목, 曾祖안자기?안우기, 高祖안향, 外祖원선지)와의 사이에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다. 처부 안원숭은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데 맏사위가 안렴사공이고, 기전룡, 성석린 등이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안렴사공파세보>, <순흥안씨 홈페이지>

○ 몰후 273년만인 1678년(숙종4 戊午)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1678년(戊午) 영모재를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1708년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다. <1802이전, 홍양호,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영모재 안내서>

○ 1708년(숙종34, 戊子) 유림들이 서원을 청주서쪽 송천에 세우고 해마다 춘추 향사를 올리었고, 1871년(고종8)에 정령에 의하여 毁撤(훼철)되었다가 충북 유도회의 주관으로 다시 복원되었고 매년 3월 20일에 院享(원향)을 받들고 있다.
그후 3년만인 1711년 辛卯년에 유생 ★이택하 등 120인이 詣闕上疏(예궐상소)하여 서원에 宣額(선액)할 것을 청하여 왕께서 該曹에 명하여 稟處(품처)하라 하였다. 그때 조정에 유사하여 일이 침체되었다. <1802이전, 홍양호,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 ?1768년 13대손 김래가 청주에 사는 일가들의 부탁을 받고 오은선생 행장을 찬하였다.

○ 1749년 충청도관찰사 홍계희가 안렴사공 墓碣銘을 찬하였다.)

○ 1781년 묘하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안렴사공 묘비 비문>

○ 1802년이전 당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홍양호가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을 초하였다.

○ 1818년(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안렴사공의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 1822년 외후손되는 남공철이 고려명신전을 지을 때 일민편에 안렴사공 기록을 수록하였다. 이를 근거로 1925년 대동기문에도 실리었다.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태조대왕이 등극하자 사렴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가 사렴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손에게 이르되 "나는 려조의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으로서 이미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또한 나라가 망함에 몸을 순국치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들어가서 선대왕과 선인을 뵈올까 보냐" 하였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자손중에 이미 벼슬했던 자는 다시 사환에 나가지 말라" 유언하였다.

○ 1830년 (순조30, 庚寅)년 7월 하순에 외손인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안렴사공의 13대손 김래의 부탁을 받고, 안렴사공 묘갈명을 찬하였다.

○ 1840년 이전 남공철이 안렴사공의 후손 人+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와 碑銘(=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광복후인 1954년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모정골에 있는 묘소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977년 신도비각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신도비 명문대로 '이수귀부'로 고치고 비각전체를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소위 '두문동72현'으로 불리는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조선후기 영조대에 와서야 조선성리학이 최고로 발달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이때에야 비밀히 또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문동이라 하면 72현으로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이조 헌종 정미(=1847)에 간행한 두문동서원지에 보면 120현이다. 곧 개성부 종봉산 아래 동두문동 48현이 있고, 개성부 만수산 아래 서두문동 72현이 있어서 합봉 120현이라 한다. 세상에는 서두문동 72현이 원운곡 소장 서첩에서 먼저 발견되어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1740년 부조현비, 1751년 두문동비,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 1934년 개성에 두문동서원 창건 등이 이루어지고
1774년 철감록---1872년 기우집---1923년 여조충렬록 간행,
1809년 두문동실기 간행
1860년 화해사전---1924년 전고대방 간행
1847,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5년 경현사지 간행 등이 이어진다.

안렴사공 기록은 기우집에는 휘자만 기록되고, 여조충렬록, 경현사지, 두문동서원지에는 거의 같은 내용의 여말의 행적이 실려 있고, 화해사전에는 원천석이 주관하는 원주 치악산 단사 제사 기록과 운곡 원천석,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순은 신덕린, 아우 석루 김사안 등과의 대화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으며, 또한 화해사전에는 백상당문인 24인, 척약재 김구용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두문동72현 박문수 후손의 家藏) 두문동회맹록과 (당시의 원본으로 박문수 가장 附記) 두문동72현록에 안렴사공(김사렴)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청주곽문명현록>

○ 1934년 두문동서원(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두문동)에 안렴사공(김사렴)과 판삼사공 둘째아들 김전 공이 배향되었고, ?1935년 경현사(전남 장성)에도 안렴사공(김사렴)이 배향되었다.

○ 1982년 7월 19일, 개성인 오○재 10대손 김영택씨 가세장 시첩에서 오은 안렴사공 충절찬양시 1편 '일편도산 만고수양' 이 발견되었고, 金崙會 家소장 선인들의 시집에서 시문 2수 '등오은김선생묘소유감-김죽산상희' '독오은김선생행장유감-전주인 이범학'이 발견되었다. <고충지, 1982>

*** 위 내용은 안렴사공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최대한 모아 편집하였음***

 

출처:www.andongkimc.kr    안동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김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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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렴(金士廉, ? ~ ?)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현중 한분이며, 여말 8청이며, 고려수절신이다.

자(字): 공직(公直) , 호(號): 오은(梧隱) 본관은 (구)안동(安東).

충렬공 김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안원숭(安元崇)의 맏사위이다. (안원숭의 셋째사위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이다.) 동생은 조선조 개국공신 김사형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장에 능하였다. 공민왕과거에 급제, 벼슬이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다. 안동 김씨(구) 안렴사(按廉使)공의 파조이다.

생애[편집]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평장사 김숙승(金叔承)의 10대손이며[1], 김방경의 4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사(文詞)에 능하였고 일찍이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 정당문학, 좌사간, 지제교 등 조정의 요직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다. [2] 포은 정몽주(鄭夢周)·목은 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집현전대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김사렴은 그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고 탄핵하였다.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은 장차 血食을 얻지 못하리이다" [3]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사렴이 홀로 탄핵을 한 것이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영호남 지방의 안렴사로 외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드디어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찬탈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공을 비롯해서 많은 신하들은 오직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만을 섬기고자 두문동 동지들과 규합하여 생사를 같이하면서 새 조정에 나아가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충북 오창)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멀리하고 이태조가 개국한 한양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열녀불갱이부 충신불사이군)" 는 고사를 외웠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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