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양박씨

박 열(1902~1974)

8월의 독립운동가 박열 [독립기념관]

연합뉴스 보도자료|입력2006.07.27 11:06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일본지역에서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고, 일왕 폭살을 계획한 박열 선생을 2006년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 기간: 2006년 8월 1일∼8월 31일

· 장소: 근대민족운동관 내

· 내용: 박열 선생이 저술한 잡지 및 저서 등 공적자료 다수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 선생은 1919년 경성고보 재학 중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0년 11월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하였고 이후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였으며,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선생은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 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서울과 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1923년 4월 선생은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일왕 폭살을 계획한 선생은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피체되었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어 투옥되었다. 선생은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출옥 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선생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송환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9년 영구 귀국한 선생은 박열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후학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노력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선생은 조소항·엄항섭 선생 등과 함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사진설명>

1. 재일조선거류민단 단장 시절 박열 선생의 모습.

2. 이른바 '괴사진'이라 알려진 박열과 가네코의 사진.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대역죄인'을 감옥 안에서 특별 대우했다고 야당에서 정치문제로 삼으려고 이 사진을 인쇄 살포하였다.

3. 박열 선생이 저술한 '신조선혁명론'. 박열 선생이 종전 이후 조국의 과제를 혁명운동의 입장에서 저술한 책이다.

<본 보도자료는 연합뉴스의 편집방향과 무관하며 모든 책임은 제공자에 있습니다>

'함양박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朴)씨는 한국의 성씨  (0) 2015.10.25
함양박씨  (0) 2014.06.06
박 재순  (0) 2013.05.14
함양박씨  (0) 201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