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마와 사상의학사상의학
2009/01/0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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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변의 역사 2008.11.4.화
이제마와 사상의학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1838-1900)는 함경도 함흥군(지금 함주군) 천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다. 어릴 적 이름은 제마(濟馬), 아호는 동무(東武)다. 이제마는 목조(이성계의 고조부)의 둘째인 안원대군의 20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이반오는 문무 양과에 급제하여 20대에 진사가 되었다. 동무의 탄생에는 사연이 있다.
아버지 이 진사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자리를 벌인 주막이 문제였다. 주막의 늙은 주모에게는 과년한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은 인물이 박색일 뿐만 아니라 사람됨이 변변치 않았다. 주모는 시집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늘 걱정을 하던 중이었다. 주량이 약한 이 진사는 그날따라 많은 술을 마셨다.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친구들은 주모에게 이 진사를 부탁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주모는 생각했다. 기왕지사 시집을 보내지도 못할 딸에게 처녀나 면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딸을 이 진사가 잠든 방에 밀어 넣었다. 결국 이 진사는 비몽사몽간에 그 딸과 관계를 맺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열 달 뒤 어느 날 이제마의 할아버지 충원공이 꿈을 꾸었다.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 주십시오." 라고 하더니 망아지를 기둥에 매어 놓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충원공은 망아지의 등을 어루만지며 기뻐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 때 마침 어떤 여인이 아기를 안고 따라왔다. "이 진사님의 아기를 데려왔으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애처롭게 우는 여인네를 보던 충원은 급히 아들을 불렀다. 연유를 묻는 충원공에게 이 진사는 할 말이 없었다. 취중이었다고 하지만 여인과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억했던 것이다.
충원공은 꿈이 생각났다. 길조라고 여긴 충원공은 여인과 아기를 함께 받아들였다. 충원공은 꿈에 제주도에서 얻은 말이라는 뜻으로 아이의 이름을 제마(濟馬)라고 했다. 충원공은 손자 제마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특별히 사랑했으며 비록 서자라고 해도 차별을 하지 않았다. 마침 이 진사에게는 아들도 없었다. 이에 충원공은 제마를 적자로 입적하면서 가족들에게도 절대 차별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마는 타고난 성품이 쾌활하고 용감했다. 비록 서자였으나 꿋꿋이 자랐다. 할아버지의 사랑도 지극하여 순탄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제마는 7살 때부터 글을 배웠다. 워낙 총명하고 영리한지라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그는 원래부터 문보다 무를 좋아했다. 주로 칼이나 활을 가지고 노는 일에 열중했다. 정의감도 유난히 강했다.
그는 힘이 넉넉히 천근을 들 수 있고, 안목이 충분히 만 리를 볼 수 있었던 인물이다. 무인다운 면과 함께 상당한 지혜를 가졌던 인물이다. 이제마는 어렸을 때 중국의 항우를 좋아했다. 항우의 죽음을 책으로 접하고 사나흘 밥을 잊기도 했다. 그의 성정은 불같았으며, 키가 9척에 호랑이 상이었다.
1846년 큰아버지 이반린이 목조의 능을 지키게 되면서 집안이 모두 신흥군 가평 능리로 이사를 했다. 그 뒤 3년 후인 1849년 아버지 이반오가 사망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이듬해에는 백부마저 세상을 떴다.
그 무렵 이제마는 첫 번째 가출을 한다. 그 뒤 21살에 홍원 출신의 김규형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러나 아내는 22살에 첫 아들 용해를 낳고 세상을 등졌다. 이로 인해 이제마는 병을 얻는다. 자신의 서자 출생, 거듭되는 식구들의 죽음과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병에 대한 깊은 고민을 주었다.
이제마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재차 가출해서 노사(蘆沙)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마는 정식으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다. 성균관에 들어간 적도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상의학을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간다. 새로운 의학이란 새로운 세계관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무는 30살 무렵 함흥의 어느 객사의 벽지에서 중요한 기록을 발견한다. 그 글은 어느 집안에 전해오던 것이다. 바로 운암(芸庵) 한석지(韓錫池)의“명선록(明善錄)”(1789년)이다.
한석지는 병과 가난과 걸식 등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비운의 유학자였다. 그는 평생 몸이 성치 못해 농사조차 지어보지 못했다. 가난해서 양식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아들과 동생도 병으로 잃었다. 어렸을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성균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야 했다.
한석지는 탈 주자학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쓴 책을 비밀리에 집안에 전했던 것이다. 이제마는 이 책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명선록을 통해 주자학적 태도를 벗어 던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제마는 39살이 되던 1875년 처음 한약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앞서 그는 둘째 부인을 맞아들였다. 35살에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를 여행했다. 화룡선(火龍船.증기선) 유선전신 대화포를 구경하는 등 새로운 문물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다.
당시는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 일대로 이주하던 직후였다. 1866년에는 병인양요, 1871년에는 신미양요도 있었다. 1872년 동무는 둘째 아들을 얻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이제마가 죽은 후에 함흥에서 보원약국을 한동안 운영했다.
이제마가 의료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몇몇 일화가 전한다. 새로운 약제조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래서‘반룡산노인(盤龍山老人)’이라는 부적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무렵 이제마는 완벽한 의사로 이름을 날렸던 것 같지는 않다. 당장 동생의 장남이 죽었고, 동생 또한 이제마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마는 뒤늦게 39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합격했다. 이듬해인 1876년 이제마는 무위별선군관으로 왕실친위 대원이 되었다. 당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어영청 대장 김기석의 추천이 있었다.
이제마는 40살에 동국의 진정한 무인이 되겠다며 스스로 동무(東武)라는 호를 붙였다. 이어 궁궐수문장군을 거쳐 1881년 통리기무아문(외교부)이 설치되자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제마는 현감 생활을 그만 둔 뒤 진주에서“격치고”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1891년 상경해서“격치고”집필을 거듭한다. 이 책에는 이제마 사상의 요체가 들어 있다. 그는 이능화의 부친 이원긍의 집에서 1893년 7월부터 1894년 4월까지 필생의 역작인“동의수세보원”을 집필 탈고한다. 그는 당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원고를 썼다. 이제마는 이원긍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이제마에게 눈을 치료했다.
별시무과에 급제한 동무는 50세 때 진해 현감 겸 병마절도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썩은 벼슬아치들은 이제마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면서 갖은 모략과 중상을 다했다. 그런 와중에서 오랜 신병을 앓던 제마는 의학공부에 매달렸다. 아무도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제마는 보국원을 운영하면서 최린 등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사상의학은 심신의학이다. 성정(性情)의 차이를 이해해서 판단하는 심성학적 태도를 취한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체질 감별이 중요한 특징이다. 체형기상론, 용모사기론 성질재간론, 항심욕심론, 체질병증론, 체질약물론 등이 중요한 내용이다. 증상이 같아도 체질별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임상적 요소가 강한 셈이다. 주역에서 말하는‘태극- 음양- 사상- 8괘’와도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