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사라진 삼별초, 오키나와 건너가 류큐왕국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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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14 03:35 / 수정 : 2009.03.14 13:40
1273년 제주도서 패주한 일부세력 오키나와로 항해 당시 배로 빠르면 3일 걸려
대제국 몽고의 말발굽이 고려를 짓밟던 13세기 최후까지 대몽(對蒙) 항쟁을 벌였던 군사집단이 삼별초(三別抄)였다.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간 해인 1270년(원종 11)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배중손(裵仲孫)의 지휘 아래 항거를 시작했다.삼별초는 1271년 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근거지였던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옮겨 갔고 여기서 지금의 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며 사투를 벌였다. 1273년 4월, 전선 160척에 탄 연합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주도를 맹공했다. 김통정은 자결하고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됐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거기서 이들이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과연 포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남김없이 전멸했던 걸까? 만약 살아남은 삼별초 세력 중의 일부가 가슴에 한(恨)을 품은 채 수평선 너머 남쪽으로 떠났다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 제주도 남쪽으로 700~800㎞ 떨어졌으며 훗날 홍길동이 건너가 세웠다는 '율도국'이 바로 거기였다는 얘기도 전해지는 섬, 오키나와(沖繩)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것이 상상 속의 얘기가 아닌 상황이 됐다. 학계에서 정말 그런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윤용혁 공주대 역사학과 교수는 20일 열린 한국중세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논문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본섬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 등지에서 출토된 기와가 1273년 고려 삼별초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다.
두 기와 모두 가운데 둥근 원 주위로 연꽃 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 무늬가 있었다. 박물관의 연꽃 잎이 8개, 오키나와 것이 9개라는 것 정도만 달랐다. 박물관 기와는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3/2009031301226.html